예수님의 매력

예수님의 매력

성경: 고린도후서 47-18

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1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2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13 기록된 바 내가 믿었으므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었으므로 또한 말하노라

14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

15 이는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17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고후4:7-18)

예수님의 매력은 역설적인데 있다.

예수님은 한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하셨다.

예수님은 좁은 길로 가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처음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된 자가 처음 된다고 하셨다.

그래서 세상은 거꾸로 볼 필요가 있다. 바로 보다가 실증이 나서 거꾸로 보라는 뜻이 아니다. 사람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지 말고, 하나님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라는 뜻이다.

, 현재 우리는 세상을 거꾸로 보고 있으니 바로 보라는 뜻이다.

지금까지 내 입장에서 생각했고, 내가 옳다고 여겼던 것을 믿었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추구했다면, 전혀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보는 것은 검증하는 것도 되고, 뜻밖에 돌파구를 발견하는 계기가 되기도 할 것이다.

 

뭐든지 뒤집어보아야 한다는 논리는 아니다. 내 자신이 스스로를 점검하면서 뒤돌아보면서 진리를 탐구해야 한다는 뜻이다. 물론 조심스럽게.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면서 상상하지 못한 생을 살게 되었다.

바울은 은근 알카에다스러운 면이 있었다. 엄청난 율법주의자였고, 율법을 향한 열정이 대단해서 율법을 무시하는 듯한 기독교인들을 향한 적개심이 하늘을 찌를 지경이었다.

급기야는 스데반을 처단하는데 앞장을 서게 되었고, 참다 못한 예수님이 바울에게 강압적으로 나타나셔서 바울은 기독교인이 되고 만다.

그후 바울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전적으로 매진하게 되었는데, 결국에는 가장 예수님을 닮은 자가 되었다. 결국 예수님은 바울이 가지고 있던 것 중에서 기독교인을 향한 가장 강력한 무기로 사용하였던 율법을 역이용하신 셈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 없는 율법은 스데반을 죽이는 악한 도구였지만, 예수를 위한 율법은 바울을 최고의 사도로 만들어내는 선한 도구가 되었다.

가장 쓸모 없는 것이 최고의 가치를 만들어내는 도구가 된다면 얼마나 드라마틱하고 통쾌한 일인가? 오늘 본문 말씀이 바로 그런 삶에 대한 증언이 된다.

 

심지어 바울은 스스로를 질그릇으로 비유하였다. 질그릇은 그릇 가운데 비천한 그릇이다. 아무려면 어떤가? 그 질그릇에 다이아몬드가 담겨 있다면 금잔에 구정물이 담겨있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 안에 예수님이 계시다면 우리는 곧 보배를 담고 있는 질그릇인 셈이다. 예수님의 매력이 여기에 있다.

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은 바울의 진실한 신앙고백이다. 그런데 이런 고백이 매력 있지 않는가? 우리도 기독교인인데 마땅히 이런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바울이 무엇을 우리에게 알게 하려 하는가? 역설적으로 자신의 삶을 바라볼 필요를 깨우치고 있다. 스스로를 질그릇으로 여기면서 예수 보배를 담으려고 해야 한다. 내 스스로의 그릇을 탓하지 말고 그 그릇에 무엇이 담겨 있나를 생각해 보자. 이미 나에게는 예수 보배가 담겨있지 않는가?

 

진실한 삶은 나의 본 모습을 분명히 깨닫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모든 인생은 하나님 앞에서 보잘 것 없는 질그릇임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 안에 예수 보배를 담아야 한다.

만약 그 반대로 다른 사람들의 화려한 모습을 보는데서부터 시작해서 나의 모습을 비교한다면 나는 비참할 수밖에 없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거기에는 소망이 없다.

 

모든 인생에게 현실은 8절과 같다. 그 현실로 돌아와 보자.

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현실은 우겨쌈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자. 경제적으로, 건강으로, 사회적으로, 영적으로, 심리적으로 나는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나에게 중요한 사람이지만, 나에게 부담이 되고 있지는 않는가?

-지금 현재 충분히 스트레스를 잘 이겨내고 있는가? 스트레스를 잘 이겨내는 이유가 무엇인가? 스트레스로부터 도망가지 않고 스트레스를 이겨낼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에게는 예수 보배가 있기 때문이다.

예수만 믿으면 만사형통인가?

아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니다. 믿음이란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믿는 것이다. 그렇게 믿었으면 그 길을 걸어야 하고, 그 진리를 행동으로 옮겨야 하고, 그 생명을 내가 거머쥐어야 한다.(내 것으로 삼아야 한다.)

 

기독교의 생명은 그 믿은바와 깨달은 바를 행동하는데 있다. 기독교의 생명은 율법주의적인 행동이나 종교적인 행위에 있지 않다.(종교적인 행위는 예배, 찬양, 기도, 성경읽기, 전도, 선행, 교회를 위한 헌신 뿐이다.)

 

나는 항상 진리를 공급받고 있다. 나에게는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이 있다. 그리고 나에게는 예수님을 위한 헌신이 있다. , 언제든지 예수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하늘의 예금통장이 있다. 어떤 낙심할 만한 일이 있어도 나는 낙심하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심지어는 억울한 일을 당해도 나는 망하지 않는다. 왜냐면 나는 그만큼 건강하기 때문이다. 누군가 나를 망하게 해도 나는 망하지 않는다. 그가 나에게 손해를 끼쳤을지라도 나는 그 손해 때문에 무너지거나 망하지 않는다. 그것이 기독교인의 건강함이다.

9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나는 얼마든지 져도 되고, 손해봐도 된다. 억울한 일을 당해도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 누군가 나를 넘어뜨려도 나는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고, 나를 못살게 굴어도 나는 버림 받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지 않으신다. 나는 사막 가운데서도 살아남고 부자가 될 수 있다. 그만큼 나는 건강하고 활동적이며 능동적이며 적극적이다. (하갈 이야기)

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진다는 의미는 다른 사람을 향한 희생을 의미한다. 대신 손해를 당하고 대신 저주를 감당한다는 뜻이다.

-그렇게 함으로 예수님의 부활 생명이 나에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물론 쉽지만은 않다. 눈물을 흘리기도 하며, 분노를 삭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결국은 믿음이 이기고 예수님의 마음이 이긴다. 선으로 악을 이긴다. 예수님의 성품으로 원수를 사랑하고, 사람같지도 않는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게 된다.

-그래서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나기를 소망하자. 병에서 나음 받기를 소망하자. 더욱 건강해 지기를 소망하자.

11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7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그리고 우리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있다. 그 영원한 생명이 오늘 우리에게 실제적인 힘을 준다. 아멘.

sunlinkr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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