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였던 서경석 목사가 왜 지금 보수가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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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65세의 중늙은이 서경석목사입니다. 저 같은 60대는 이러다가 나라가 종북좌파(북한추종세력)의 손에 넘어가지 않을까 하고 걱정합니다. 그런데 젊은이들은 저 같은 사람을 '꼴통보수'라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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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on, 19 Oct 2015 21:04:36 +0900

 

[논단] 좌파였던 서경석 목사가 왜 지금 보수가 되었나

기독일보 데스크 기자 (desk@cdaily.co.kr)

입력 2012. 04. 10 11:04  |  수정 2012. 04. 10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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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석의 세상읽기]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드리는 편지

▲ 서경석 목사(선진화시민행동 상임대표/기독교사회책임 공동대표)

1. 왜 이글을 쓰게 되었나?

안녕하세요. 저는 65세의 중늙은이 서경석목사입니다. 저 같은 60대는 이러다가 나라가 종북좌파(북한추종세력)의 손에 넘어가지 않을까 하고 걱정합니다. 그런데 젊은이들은 저 같은 사람을 '꼴통보수'라고 말합니다. 자기들은 우파도 좌파도 아니고 이념에는 관심이 없다고 하면서도 한나라당(새누리당)은 싫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나꼼수'에 환호하고 결과적으로 나라가 좌파 손에 넘어가는 것을 돕고 있습니다. 그래서 왜 나이든 사람들이 이토록 나라를 걱정하는지를 제 이야기를 통해 설명드리고자 합니다.

2. 대한민국에서 황당한 일이....

어떤 분이 제게 <미꾸라지 진짜 용된 나라 대한민국>이란 소책자를 주었습니다. 내용을 읽어보니 우리나라가 선진국대열에 들어섰다는 것입니다. SONY를 포함한 일본의 10대 전자회사가 낸 흑자를 다 합쳐도 삼성SDI가 낸 흑자보다 못하고 세계 TV판매의 1,2등은 삼성과 LG이고 인천국제공항도 6년 연속 세계최우수공항상을 받았고 삼성전자는 영업이익 17조원으로 미국의 제너럴 일렉트릭(GE)를 넘어섰고 IT기업 중 세계1위가 되어 세계 스마트폰 시장에서 애플사와 1,2위를 다투고 있습니다. 또 한국은 세계2위의 철강대국이고 세계10대 경제대국입니다. 아프리카 53개국의 연간 GDP가 6천억불인데 한국의 연간 GDP는 6천7백억불로 아프리카 전체보다 많습니다.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런데 북한은 김정은으로 3대세습을 했고 김일성의 시신을 안치하기 위해 금수산 궁전을 짓는 동안 3백만명이 굶어죽었고, 김정일 상중(喪中)에 탈북하면 3대를 멸족시키겠다고 협박하는, 세계 최악의 인권유린 국가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는 황당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작년 6월30일 수원지방법원 제410호법정에서 종북(從北)까페인 ‘사이버민족방위사령부’ 운영자인 황길경 피고는 국가보안법 재판을 받으면서 “위대한 김정일 장군님 만세”를 외쳐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또 작년 8월20일 서울시청 앞에서 보수 대학생단체가 북한인권문제 다큐멘타리 영화 '김정일리아'를 상영하고 있었는데 좌파시위대 4천명이 서울광장으로 몰려와 전선을 끊어 이 영화의 관람을 중단시켰습니다. 그리고 종북좌파 정당인 통합진보당은 지금 원내교섭단체를 꿈꿀 만큼 세력이 강대해 졌습니다.

3-1. 왜 한국에서 종북좌파 세력이 강대한가?

이 이유를 알려면 과거 민주화운동 시절로 돌아가야 합니다. 87년 6월 민주화 대항쟁 당시 민주화를 이루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학생세력이 대부분 김일성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세력이었습니다. 왜 그런가? 혹독한 군사독재 치하에서 민주화세력은 강고한 투쟁을 하기 위해 흑백논리로 무장해야 했는데 한국상황에 맞는 논리가 없었기 때문에 학생운동권은 이 논리를 막스 레닌주의, 김일성 주체사상, 마오이즘 등에서 차용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기독교운동 안에서는 '민중신학'이라는 흑백논리가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김일성 주체사상론(NL)이 막스 레닌주의(PD)보다 훨씬 더 유연했고 그 결과 NL파가 학생운동의 주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민주화 대항쟁 때 한국을 민주화시킨 세력이 바로 이 종북(從北)좌파세력이었습니다. 지금도 우리나라에서 종북좌파가 기승을 부리는 이유도 아직 우리나라가 군사독재 시절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원래 승리의 경험을 한 사람은 기(氣)가 셉니다. 이 세력이 시간이 지나면서 사회 각계로 진출하여 시민운동을 좌파로 만들고, 교사가 되어 '전교조'를 만들고, 노동자가 되어 '민노총'과 '민노당'을 만들고 기자가 되어 언론노련을 만들었으며 학계, 정관계, 법조계로 진출했습니다. 이들은 규모도 3-40만명이 되는 대한민국 최대의 세력입니다. 그리고 기회있을 때마다 반미(反美), 반한(反韓) 투쟁을 전개해 왔습니다. 미순이 효순이 촛불시위, 대통령 탄핵반대운동, 맥아더동상 철거사건, 평택 미군철수투쟁, 한미FTA 반대투쟁, 광우병 촛불시위, 제주도해군기지반대투쟁, 희망버스 등 대한민국을 흔드는 운동을 전부 주도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민주통합당도 말 바꾸기를 하면서까지 이들의 영향권 안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리고 6.25때 대한민국을 구해준 미국을 적대하고 6.25를 일으킨 북한의 대남공작에 협력하고 있습니다.

3-2. 나도 친북좌파였다

제가 왜 이런 말을 자신있게 하는가? 저도 젊은 시절 친북좌파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대학 2학년 때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되었습니다. CCC 경제복지회에 가입했는데 그곳에서 한명숙 민주통합당 대표의 남편인 박성준 씨를 만나 그분으로부터 사회주의 비밀지도를 받았고 그 결과 사회주의를 신봉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통혁당사건이 터지면서 박성준 선배는 징역 15년형을 언도받았고 저는 잡혀갔다가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훈계방면 되었습니다. 그 후 저는 유신체제와 싸우다가 민청학련사건으로 징역 20년형을 언도받았고, 산업선교 활동을 하다가 YH사건과 동일방직사건으로 두 번 더 노동자와 함께 감옥에 갔습니다. 이러한 민주화 투쟁 속에 있으면서도 제 사고의 틀은 여전히 '사회주의'였습니다.

1982년 저는 미국으로 유학 가서 88년까지 미국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미국에 가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제가 미국에 막 도착했을 때 교포사회에서 는 북한방문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북한을 한주일간 방문하는 사람은 북한의 실상을 잘 모릅니다. 그러나 가끔가다 아들 집에 한 달간 머물다 온 노인이 있었습니다. 제가 다닌 뉴욕 부르클린 한인교회에도 그런 할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 할아버지는 한 밤중이면 아들과 단둘이 이불을 뒤집어 쓰고 아들로부터 북한의 진실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할아버지가 제게 아들이 들려준 북한의 진실을 들려주었습니다. 그것은 북한이 거짓으로 가득 찬 나라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서야 미망(迷妄)에서 깨어났습니다. 그리고 나는 이제부터 더 이상 어두운 뒷골목에서 음모가(陰謀家)의 삶을 살지 않고 햇볕이 내리 쪼이는 개명천지(開明天地)에서 맑은 대기를 호흡하며 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저는 88년 초에 귀국해서 운동권의 연구기관인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의 원장서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연구원에서 파악해보니 일반 학생운동은 말할 것도 없고 기독학생운동까지 전부 김일성 주체사상파가 되어 있었습니다. 기독교단체의 성명서들도 전부 북한방송을 베낀 것이었습니다. 대학 캠퍼스를 가면 “미 제국주의자의 각을 뜨자”는 식의 충격적인 구호가 난무했습니다. 저는 처음 6개월간 후배들의 눈치만 살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는 내가 이들을 의식화시켜 진보운동을 하게 했기 때문에 지금 이들이 주사파가 된 데에는 나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운동권에서 쫓겨나는 한이 있더라도 후배들에게 바른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후배들에게 기독교운동은 성경말씀에 기초해서 해야지, 주체사상론에 입각해서 하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한번은 후배 한 사람을 몰래 불러 사회주의는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이 화근이 되어 후배들이 저를 개량주의자라고 비판하면서 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장 직에서 내쫓는 운동을 했고 결국은 진보기독교 진영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새로 시작한 운동이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이하 경실련)이었습니다.

저는 경실련을 시작하면서 운동권의 운동방식을 전부 뒤집었습니다. 운동권이 사회주의를 지향할 때 경실련은 '시장경제체제'를 주장했습니다. 운동권이 비합법운동을 할 때 우리는 합법운동을 주장했습니다. 운동권이 민중운동을 하면 우리는 보통사람이 중심이 되는 '시민운동'을 했습니다. 운동권이 계급투쟁을 할 때 우리는 '사회적 공공선'을 추구했습니다. 운동권이 기업을 적으로 돌릴 때 우리는 기업가와 노동자를 합쳐 '생산자계층'이라고 한다면 생산자 계층의 편에 서서 불로소득 계층을 비판했습니다. 경실련이 주장한 경제정의는 평등이 아니라 사람들이 균등한 기회를 누리며 공정하게 경쟁하는 사회입니다. 그리고 경쟁에서 탈락한 사람의 생존권을 보장해야 합니다. 이러한 경실련의 노선은 시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습니다.

경실련이 창립된지 5년이 지난 94년에는 경실련이 한국 사회운동의 주류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영향으로 94년에는 남아있던 재야운동이 시민운동으로 전환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출범한 단체가 <참여연대>입니다. 그 후부터 시민운동 안에서는 경실련과 참여연대의 주도권 다툼이 시작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경실련과 참여연대의 차이를 잘 알지 못합니다. 경제정의, 시민참여, 분권, 지방자치와 같은 영역에서는 생각의 차이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북한문제와 노동문제가 나오면 생각이 달라집니다. 참여연대는 무조건 북한편을 들고 노동자 편을 들었지만 경실련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서울지하철노조가 파업을 하면 참여연대는 노동자 편을 들었고 경실련은 왜 시민들의 발을 묶냐며 시민의 편에 섰습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경실련은 과거 운동권과 단절하고 새출발을 했지만 참여연대는 과거 운동권의 연장선상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4. 낙선낙천운동은 좌파 시민운동의 시작

그러다가 2000년 '낙선낙천운동'을 고비로 참여연대가 시민운동을 주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박원순 변호사가 주도한 낙선낙천운동은 경실련운동의 철학을 완전히 뒤집는 것이었습니다. 경실련은 진리는 여론조사나 투표 등 다중의 여론으로 결정되면 안 되고 양식있는 지식인들의 이성적 토론으로 구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경실련 상임집행위원회는 한 번도 표결로 의사를 결정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낙선낙천운동은 국민의 지지가 높으니 이 운동이 옳았다는 것이 입증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과거 운동권이 민주집중제라 하여 민중이 투표로 한 결정은 전부 옳다고 주장했는데 낙선낙천운동은 이러한 옛날 생각으로 되돌아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경실련식(式) 시민운동은 낙선낙천운동 이후 포퓰리즘적 운동으로 대치되었습니다. 한국사회에서 포퓰리즘이란 말이 낙선낙천운동 이후에 나오게 된 것도 전혀 우연이 아닙니다. 또 낙선낙천운동은 잘못된 선거법은 지킬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당장에는 인기가 있었을지 모르지만 이로 인해 이후의 시민운동은 국민을 향해 법과 질서를 호소할 수 있는 도덕적 힘을 잃고 말았습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낙선낙천운동의 독선(獨善)이었습니다. 시민운동은 겸손해야 하고 국민의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진리도 자기가 결정하지 않고 정보를 국민에게 공개해서 국민이 결정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낙선낙천운동은 법위에 군림하고 스스로 판관(判官)이 되어 정의의 잣대를 마음대로 휘둘렀고 자기들이 정한 낙선자 명단은 무오(無誤)하다고 하여 일체의 수정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낙선낙천운동은 편향적인 특정정당 지지운동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국민의 사랑을 받았던 시민운동은 그 후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고 시민운동이 권력화 되고 내부의 언로(言路)가 막혀 낙선낙천운동에 대한 비판이 일체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시민운동 내에서 낙선운동이 잘못되었다고 말한 사람은 저와 이석연 변호사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낙선낙천운동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상임대표직 취임을 거부당했습니다.

한국역사에서 낙선낙천운동처럼 크게 홍보가 된 시민운동은 없었을 것입니다. 한달 내내 모든 언론의 톱뉴스였으니 말입니다. 어떤 시민운동가는 묘비에 낙선낙천운동을 했던 사람이라고 쓰겠다고 말할 정도로 대성공한 운동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 운동은 시민운동의 묘혈을 판 운동이었습니다. 이 운동 이후 시민운동은 완전히 좌편향으로 갔고 그 결과 시민들로부터 외면당했습니다. 박원순 변호사는 이 운동의 최대의 수혜자이지만 사실은 시민운동의 몰락의 책임을 져야할 사람입니다. 박원순 변호사는 대법원과 헌법재판소가 합헌이라고 판시한 국가보안법을 “아무런 죄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을 교도소에 처넣어 피비린내 나는 고문으로 용공을 조작한 악랄한 법”이라고 규정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김용갑 의원과 같은 사람을 국가보안법 폐지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낙선낙천운동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국가보안법 폐지운동을 확산시켰습니다.

결국 민주화 대항쟁 때 학생세력이었던 386세대가 성장하면서 조성한 거대한 좌편향 흐름이 나중에는 경실련까지 삼키고 말았습니다. 저는 제가 창립한 경실련까지 포기하고 다시 좌파와 맞서는 운동을 시작해야 했습니다.

5. 친북좌파의 둘러리가 된 좌파 시민운동

2002년말 미선이 효순이 촛불시위를 계기로 우리나라 시민운동은 좌파 시민운동의 성격이 굳어집니다. 그 전에는 시민운동이 그렇게까지 좌파적이지 않았습니다. 미선이와 효순이의 죽음은 단순한 교통사고입니다. 장갑차가 미선이와 효순이를 보지 못하고 치은 것입니다. 그러나 한총련, 민노총 등 친북좌파들은 이 사건을 성조기를 불태우는 반미운동으로 발전시켰습니다. 당시 시민운동 지도자였던 박원순 변호사나 최열 사무총장은 처음부터 친북좌파는 아닙니다. 그래서 두 분은 한총련과 민노총을 비판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고 오히려 친북좌파와 손을 잡고 반미운동을 전면에서 이끌었습니다. 거대한 쓰나미처럼 몰려오는 종북좌파의 파도 앞에 결연히 맞서는 대신 그 파도 위에 올라탔습니다. 그 결과로 한국의 시민운동 주류는 종북좌파의 앞잡이가 되었고 세상사람들이 반미친북세력을 규탄할 때 시민운동도 함께 질타당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박원순 변호사나 최열 총장이 김지하 선배처럼 이들을 비판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세계 어느 나라가 미군의 단순한 교통사고를 가지고 도심을 무법천지로 만드는 시위를 합니까? 만일 우리나라가 아프리카의 이름도 모르는 나라의 내전(內戰)에 참전해서 5만명의 우리 젊은이가 목숨을 바쳤는데 그 나라에서 태극기를 불태우며 반한(反韓)시위를 했다면 우리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그 후 좌파 시민단체들은 종북좌파와 한통속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하고,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고, 이라크 추가파병을 반대하고, 제주도 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했습니다. 북한정권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이 우호적이었고 대한민국에 대해서는 형편없이 가혹했습니다.

6. 맥아더동상 철거시도 사건과 평택 미군철수 시위

2005년 9월의 맥아더동상 철거시도 사건도 큰 획을 그은 중대사건입니다. 맥아더 동상 철거사건 전에는 우리국민이 우리나라에 친북좌파세력이 광범위하게 존재함을 몰랐습니다. 공산권이 망하고 북한도 비참한 상황 속에 있는데 한국에 어떻게 친북좌파가 있겠는가 하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친북좌파는 극우세력이 진보세력을 메카시즘적으로 공격하는 말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저 역시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맥아더 동상을 철거하겠다며 수천명이 모인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이들은 인천상륙작전이 없었으면 한반도가 김일성에 의해 통일되었을 텐데 안타깝게도 분단되어 통탄스럽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이 철거사건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처음 종북(從北)좌파 세력이 자신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입니다.

저는 이들이 누구인지 조사했습니다. 그랬더니 전교조, 전농, 민노총, 민노당, 범민련, 한총련, 민중연대, 통일연대, 그리고 나중에 진보연대였습니다. 숫자도 3-40만명이 됩니다. 학생운동의 주사파가 나중에 교사가 되어 전교조를 종북좌파로 만들고 민노총을 종북좌파로 만들고 종북좌파 정당인 민노당을 만들었습니다. 이들은 구(舊)좌파처럼 사회주의혁명까지 추구하지는 않았지만 계급주의적 역사관을 가지고 세계화를 반대하고 반미친북의 입장에 서서 북한인권문제에 침묵하고 미군철수를 주장하고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했습니다.

저는 박원순, 최열, 한완상 등 모든 시민단체 지도자들에게 메일을 보내어 맥아더동상 철거사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질문하였습니다. 그러나 단 한 사람도 답변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습니다. 저는 이 모습을 보고 우리나라 지식인 사회가 얼마나 허약한지를 절감했습니다. 다음에는 나는 어떻게 할까를 고민했습니다. 저도 한 달을 고민했습니다. 내가 종북(從北)좌파를 반대하면 틀림없이 후배들이 나를 보고 꼴통보수라고 비난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 수모를 감수하더라도 할 말을 하는 것이 '애국'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다음부터 저는 길거리에 나가 “친북좌파 척결이 시대정신이다”라고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아니다 다를까 그 다음부터 후배들이 저를 변절자, 꼴통보수라고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좌파들이 평택 미군기지 철수를 주장하며 비무장 군인을 죽창으로 공격하는 것을 보고는 평택까지 내려가서 규탄집회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그 데모에 온 사람들은 거의 다 군복을 입은 재향군인 할아버지들이었습니다. 저는 전에는 군복입고 집회에 오는 재향군인들은 극우라고 생각하여 그들과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평택에서는 그분들에게 눈물을 흘리며 감사해 했습니다. 그분들이야말로 진정한 애국자였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 자리에서 “친북좌파를 척결해야 한다고 말하니까 사람들이 나보고 꼴통보수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말을 했다고 제가 꼴통보수가 된다면 저는 이제부터 당당하게 말하려고 합니다. 보수는 좋은 것입니다. 이제부터 저는 자랑스런 보수가 되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왜 이명박 후보가 압승했는가? 그 이유는 맥아더동상 철거사건과 평택 미군철수시위 때문입니다. 친북좌파에 대한 공포심 때문입니다. 민주당이 정권을 잡으면 친북좌파가 설치는 꼴을 봐야 하는데 그 꼴을 어떻게 보나 하는 생각에서 BBK 의혹을 아랑곳 하지 않고 이명박 후보에게 묻지마 투표를 했습니다.

7. 이명박 정권의 출범과 광우병 촛불시위

이명박 정권 출범이후 진보진영은 종북좌파와의 관계를 단절하지 않으면 앞으로 진보는 영원히 정권을 잡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변화를 시작한 곳이 민노당이었습니다. 노회찬, 심상정, 조승수 같은 이들이 민노당 주류를 종북(從北)주의라고 비판하고 더 이상 그들과 당을 같이 할 수 없다며 뛰쳐나와 진보신당을 만들었습니다. 만일 그때의 분위기가 계속되었더라면 우리나라에서 종북좌파가 청산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광우병 촛불시위'가 터졌습니다. 이 촛불시위는 종북좌파들의 작품입니다. 강기갑, 천영세, 박석운, 오종렬, 한상렬 등 맥아더 동상 철거사건을 주동한 사람들이 그대로 광우병 촛불시위를 주동했습니다. 그리고 월드컵 붉은악마 축제와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 많은 젊은이들을 끌어들였습니다. 이 촛불시위가 성공하는 바람에 코너에 몰렸던 종북좌파 세력이 다시 진보세력의 중심에 서게 되었고 좌파 시민단체들이 다시 종북좌파의 둘러리를 서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불행한 사건입니다.

저는 광우병 촛불시위가 한창일 때 조선족동포를 위해 단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명박 정부가 한국에 온지 17년이나 된 조선족들을 추방하겠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단식 25일째가 되어서야 법무부가 내말을 받아들였습니다. 저는 그 다음날로 청계광장에 나가 광우병 촛불시위를 중단할 것을 촉구하는 1인 시위를 매일 두 시간씩 두주일 동안 했습니다. 1인 시위를 하는 나에게 모멸감을 주기 위해 좌파들의 온갖 훼방을 놓았습니다. 호루라기를 계속 불어대는 사람, 쓰레기를 던지는 사람, 내가 연설을 할 때마다 내 앞에서 연설하는 사람, 나보고 변절자라고 소리치는 사람, 친일파라고 소리치는 사람..... 별의별 사람이 다 있었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저를 보호하기 위해 서울조선족교회 교인 30명이 매일 저를 둘러쌌습니다. 이 기간 동안 모금을 했는데 삽시간에 수천만원이 걷혀 그 돈으로 아르바이트를 써서 서명운동을 했고 그 서명운동에 호응해서 1만명의 목사님들이 광우병 촛불시위 중단을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촛불시위는 중단되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변절자가 아닙니다. 변절은 좌파들이 했습니다. 우리가 과거에 군사독재와 싸워 우리나라를 민주화시켰으면 그 다음에는 북한 세습독재와 싸워 북한을 민주화시켜야 합니다. 그런데 북한인권을 말하면 사람들이 꼴통보수라고 하고 변절자라고 합니다. 또 나는 친일파도 아닙니다. 나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중국으로 망명하셔서 상해임시정부에서 활동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국민훈장 애국장을 받으셨고 지금 두 분 다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에 모셔져 있습니다.

8. 청산되어야 할 종북좌파 세력

우리 역사에는 청산되어야 할 세력이 있습니다. 사람은 그대로 있어도 세력으로서의 친일파는 청산되었습니다. 세력으로서의 군사독재세력도 청산되었습니다. 세번째로 청산되어야 할 세력이 종북좌파입니다. 대표적인 종북좌파가 민노당(지금의 통합진보당)과 전교조(전국교직원노동조합)입니다. 민노당이 김정일 추종세력이었기 때문에 민노당 핵심당원들이 일심회, 왕재산사건과 같은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도 민노당은 관련자 출당이나 대국민사과와 같은 조치를 일체 하지 않았습니다. 민노당은 태극기에 대한 경례도 애국가도 절대로 부르지 않는 정당입니다. 다만 유시민 씨 측과 합당하면서 태극기에 대한 경례는 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애국가는 절대로 부르지 않기로 했습니다.

종북좌파는 낡은 보수세력이지, 진보가 아닙니다. 우리나라의 합리적인 진보는 손학규, 김진표 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손학규나 김진표도 종북좌파와의 연대를 끊어야 합니다. 만일 민주통합당이 종북좌파와의 연대를 끊는다면 저는 즉각 새누리당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정치적 중립을 택할 것입니다. 그러나 민주통합당이 종북좌파와 연대하는 한 나는 새누리당에 표를 던질 수밖에 없습니다.

9. 나는 왜 북한인권문제에 관심 갖게 되었나?

저는 과거에는 북한인권에 대해 관심이 없었습니다. 북한에 인권문제가 있는 것은 알았지만 한반도 평화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었습니다. 6.25전쟁을 치른 나라로서 전쟁방지가 우선이고 북한인권은 평화정착 후에 다루어도 늦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이 바뀌게 된 것은 서울조선족교회 목사로서 연변에 사는 교인들을 방문했을 때였습니다. 연변에서 저는 62명의 탈북동포들이 중국공안에 붙잡혀서 북한에 강제송환되었는데 전원이 총살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당시 저는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북한동포돕기를 열심히 하던 때였습니다. 저는 한 시간이라도 더 일하면 동포를 한명이라도 더 살릴 수 있다는 생각으로 매일 자정까지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런데 총살소식을 듣고는 몸이 굳는 것 같은 전율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목사인 내가 이 소식을 듣고도 가만히 있으면 나는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연변에서 귀국한 후 한국에 와 있는 탈북자들을 만나기 시작했습니다. 탈북자들의 이야기를 듣는 일은 정말 고통스러웠습니다. 조선족 동포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지겨웠는데 탈북자들의 이야기는 조선족과는 비교가 되지 않게 참혹했습니다. 그래도 그들을 따라다니며 열심히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지난 날을 회개했습니다. 제가 얼마나 이기주의자인가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한반도 평화가 우선”이라는 말은 일제시대의 가쯔라-태프트 밀약과 같은 것입니다. 이 밀약은 미국의 태프트와 일본의 가쯔라가 만나 일본이 한반도를 지배하는 것을 미국이 용인하고 미국이 필리핀을 지배하는 것을 일본이 용인한다는 밀약입니다. 이 조약은 두 수퍼파워 간의 조약이기 때문에 세계평화에는 기여하겠지만 우리민족에게는 너무도 절망적인 소식이었습니다. 그런데 ‘한반도 평화가 우선’이라는 말은 북한 인권문제를 외면하는 대가로 북의 김정일로부터 우리의 생명과 재산과 안전을 보장받겠다는 생각입니다. 북한동포들에게는 너무도 절망적인 소식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북한인권만을 주장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북한인권 못지않게 한반도 평화도 중요합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안 되기 때문에 “무찌르자 김정일” 식(式)으로 가면 안 됩니다. 우리는 한편으로 한반도의 평화를, 다른 한편으로 북한인권을 말해야 합니다.

물론 북의 김정은정권은 우리의 생각을 허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이 두 가지를 함께 주장해야 하고 결국은 북한이 우리를 따라오게 만들어야 합니다.

당시 저는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공동대표였습니다. 이 단체는 제가 창립한 한국의 대표적인 북한동포돕기운동 단체입니다. 그런데 북돕기를 하려면 북한인권문제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한국의 젊은이들이 지나치게 친북좌파의 길로 가는 것을 보고 저처럼 과거에 통일혁명당 사건에 관련되기도 했고, 독재와 싸우다 감옥도 세 번 갔고, 경실련 경제정의운동도 하고, 북한동포돕기운동도 한 사람이 나서서 젊은이들에게 바른 말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2년을 고민하다가 탈북동포 돕기운동을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저는 “탈북난민강제송환저지 국제켐페인”이라는 단체를 창립해서 일년에 몇 번씩 각 나라 중국대사관 앞에서 동시다발로 강제송환을 반대하는 집회를 시작했습니다. 효자동 중국대사관 앞에서는 수없이 집회를 했습니다. 그러자 북한은 한국기독교총연합회로 팩스를 보내어 저를 배신자로 규정하고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을 압박했습니다. 실무자가 북돕기를 하기 위해 북한을 방문해야 하는데 저 때문에 실무자의 북한방문 길이 막혔습니다. 이용선 사무총장이 찾아와 하소연했습니다. "제발 사표를 내주십시오.“ 그래서 할 수 없이 제가 창립자(founder)인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의 공동대표직을 사임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본격적으로 북한인권 운동에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10. 언제까지 북한에 굴종하며 살 것인가?

그런데 우리나라의 진보세력은 북한인권문제에 침묵합니다. 그런데 진보 기독교가 북한인권문제에 침묵하는 것은 저는 납득할 수 없습니다. 70년대에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개발을 위해 민주주의의 유보가 불가피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때 진보 기독교는 “우리는 빵만으로 살 수 없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그 말을 했던 진보 기독교가 지금 와서 북한주민을 보고 빵만으로 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이중잣대이고 북한주민을 사람으로 대접하지 않는 것입니다.

70년대에 안병무 박사가 젊은이들에게 마가복음 2장 27절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는 구절을 가지고 설교하셨습니다. 그때 안 박사님은 이 구절이 기독교의 인권헌장이라면서 "헌법과도 같은 안식일법 조차도 인간을 억압할 때는 이에 맞서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 말씀"이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체제나 이념이나 이데올로기도 인간을 억압할 때는 기독교인은 이에 저항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때가 유신헌법이 발동된 직후였기 때문에 당시 젊은이들은 이 말씀을 '감옥 가라'는 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실제로 저는 유신헌법에 저항했다가 민청학련사건으로 징역 20년을 언도받았습니다.

저는 1998년 이후 북돕기를 위해 다섯 번 북한을 방문했습니다. 북한을 방문할 때마다 반드시 가야하는 곳이 만경대 김일성 생가와 김일성 동상입니다. 그리고 주체사상탑, 개선문 등 몇 군데를 가야 합니다. 그런데 나는 항상 맨 뒤에서 울면서 따라 다녔습니다. 아마 안내원은 제가 감격스러워 우는 것으로 착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것이 아니라 제가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에 맞서 감옥을 세 번이나 갔었는데 지금 박정희 정권보다 백배는 더 독재인 김일성-김정일 수령독재체제 앞에서 말 한 마디 하지 못하고 식량만 갖다 바쳐야 하는 내 신세가 너무 처량했기 때문입니다. 북돕기를 하는 사람은 북한인권문제에 침묵할 수밖에 없지만 북돕기를 하지 않는 분들은 북한인권에 대해 말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존재하는" 잘못된 체제를 용납하는 것이 됩니다.

저는 이명박 정부에 대해 불만이 많지만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만큼은 확고하게 지지합니다. 그동안 노무현 정부는 김정일 비위 맞추기와 퍼주기로 한반도의 평화를 유지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평화는 사이비 평화요, 거짓 평화라고 생각합니다. 북한 인권문제를 제기하는 순간 그대로 깨지는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평화는 한발짝이라도 인권개선을 가져오는 평화여야 합니다. 왜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후에 남북간 평화가 깨졌나? 그 이유는 이명박 정부가 북한 인권을 말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자 그때부터 남북간 기(氣)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북한은 이명박 정부가 노무현 정부 시대로 되돌아가기를 원했고 남한은 북한이 한국을 따라오기를 원했습니다. 이 氣싸움 과정에서 북한은 두 번의 승부수를 두었습니다. 하나는 천안함 폭침이고 또 하나는 연평도 포격입니다. 북한은 두 사건을 통해 한국에서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을 비난하는 여론이 커지기를 바랐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지금 민주당은 이명박 정부의 정책을 비난하면서 노무현정부 때로 돌아가자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북한인권법도 제정하지 말자고 합니다. 6.25전쟁이 남침임을 북한주민에게 알리지도 말자고 합니다.

그러나 절대로 과거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노무현정부 시절로 되돌아간다고 해서 천안함 폭침과 같은 사태를 피하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폭침이 두려워 김정은 비위맞추기로 되돌아가면 그때부터 우리는 북의 눈치를 보며 살아야 합니다. 북한은 우리가 비위를 거스른다고 생각하면 천안함 폭침 같은 도발을 반복할 것입니다. 천안함 사건, 연평도 사건의 재발을 막는 방안은 단 하나입니다. 군사적 보복은 아니더라도 그보다 훨씬 더 뼈저린 고통을 북에 안겨주는 것입니다. 이점 때문에 이명박 정부는 북한에 대해 결연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저는 이 입장이 옳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사과하지 않으면 돕지 않겠다는 입장을 끝까지 밀고갈 수는 없습니다. 북한은 절대로 사과할 나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정 기간 후에는 다시 대화모드로 전환해야 하는데 김정일의 사망으로 자연스럽게 국면전환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국민은 남북간 기(氣)싸움에서 남한이 이기도록 이명박 정부를 지지해야 합니다. 이 길만이 북한을 사랑하는 길입니다. 어떤 기독교인은 우리가 북한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진정으로 북한을 사랑한다면 북한이 핵을 폐기하고 개혁개방의 길로 가도록, 조금이라도 북한인권이 개선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북한이 지금의 경직된 체제를 끝까지 고집한다면 루마니아의 차우세스크와 같은 종말을 맞을 수밖에 없습니다.

북한 인권문제를 말하는 것은 우리로서는 손해보는 일입니다. 천안함 폭침이나 연평도 사태도 이명박 정부가 북한인권을 말했기 때문에 생겼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진정으로 인간다운 삶을 살고자 한다면 손해를 보고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인권문제를 말해야 합니다.

저는 '한반도의 평화'를 원합니다. 그러나 북한인권 문제를 외면하는 대가로 얻어지는 평화라면 저는 그 평화를 반대합니다. 저는 햇볕정책을 지지합니다. 그러나 북한인권문제를 외면하는 햇볕정책은 반대합니다. 저는 6.15공동선언을 지지합니다. 그러나 그 선언이 북한인권에 대해 침묵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저는 이를 결사적으로 반대합니다.

제주도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핵심논리는 제주도는 평화의 섬이기 때문에 해군기지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이 주장을 가장 명쾌하게 반박했습니다. 평화를 지키려면 국방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60년대에 후르시쵸프가 큐바에 미사일기지를 건설하려 할 때 케네디대통령이 한 행동에서 배워야 합니다. 케네디대통령은 3차대전을 각오하고 미사일부품을 실은 배를 미 해군함정으로 봉쇄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평화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평화를 위해서는 때로는 전쟁까지도 각오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절대로 북한에 굴종하면 안 됩니다. 당당하게 맞설 수 있어야 평화를 지킬 수 있습니다.

11. 탈북난민 북송반대 운동은 반드시 승리합니다

지금 매일 오후2시와 오후7시에 효자동 중국대사관 앞에서 북송반대집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오늘(4월9일)도 57차 집회가 열렸습니다. 2월14일 처음 집회가 열렸을 때 저는 집회가 매일 열려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집회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저는 처음에는 백일 쯤 되면 더 이상 집회가 어려울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다. 우리국민는 틀림없이 북송이 중단되는 그날까지 계속 모일 것입니다. 4월24일에는 부산의 기독교인들이 버스 5대에 분승하여 서울로 올라온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버스에 “생명버스”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요즈음 기독교의 각 교단총회 지도부가 돌아가며 중국대사관 앞에 모이고 있습니다. 4월10일에는 전 세계 50개 나라 중국대사관 앞에서 동시다발로 집회를 갖습니다. 이렇게 전 세계가 지속적으로 중국을 압박하면 중국은 언젠가는 반드시 북송중단이 국가이익에 부합한다는 판단을 내릴 것입니다. 지금 중국에는 티베트 사태, 위그르 사태, 파룬궁사태, 천안문 사태 등 인권이슈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런 이슈들은 전부 중국의 체제문제를 건드립니다. 그래서 중국정부는 절대로 양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탈북자 북송문제는 외교정책 문제이지, 체제문제가 아닙니다.

지금 탈북난민 북송반대운동은 우리나라 근현대사에서 세 번째로 중요한 민족운동입니다. 첫째는 1919년 '삼일운동'이고 둘째가 7,80년대의 '민주화운동', 그리고 세 번째가 '강제송환반대운동'입니다. 이 운동이 통일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동독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체코와 헝가리가 동독난민을 동독으로 되돌려 보내지 않고 서독으로 보내면서부터입니다.

지금처럼 언론이 강제송환반대 운동에 관심을 보인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의 기회를 살려내지 못하면 다시는 이런 기회가 오지 않을 것입니다. 사생결단하고 반드시 이 운동을 성공시켜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민족의 미래가 찬란하게 열릴 것입니다.

12. 무엇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가?

저는 우리국민 앞에 네 가지 과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역시 가장 중요한 과제는 '종북좌파'가 더 이상 우리나라를 흔들지 못하게 하는 일입니다. 나이든 어르신이 제일 걱정하는 점도 이점입니다. 우리나라가 종북좌파세상이 되면 나라는 위기에 빠지고 선진국으로의 진입도 불가능해 집니다.

둘째는 '포퓰리즘' 문제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포퓰리즘의 덪에 걸려 있습니다. 여야가 선거를 앞두고 포퓰리즘 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알젠틴, 브라질, 체코 등 여러나라가 선진국 진입을 앞두고 포퓰리즘의 늪에 빠져 주저 앉았는데 우리나라도 똑같은 위기 앞에 서 있습니다. 정치인은 여야를 막론하고 포퓰리즘으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시민들이 포퓰리즘과 싸워야 합니다. 특히 세금이 어떻게 쓰이는지 감시하는 납세자운동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우리나라가 선진국으로 갈 수 있습니다.

셋째는 '기득권세력의 횡포와 독점에 의해 피해당하는 사람들의 편에 서는 일'입니다. 대기업의 횡포 때문에 중소기업이 타격을 받고, 잘못된 재개발정책으로 원주민의 85%가 쫓겨나고, 카드수수료가 대형업소는 1.5%이지만 소상공인은 3%-4.5%인 이 불공정이 시정되어야 하고 사행산업의 막강한 로비력 때문에 도박이 조장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전관예우도 청산되어야 합니다.

네 번째는 '인간다운 삶, 인간다운 정책이 유지되는 일'입니다. 가난한 나라를 위해 더 많은 예산을 쓰고, 북한동포를 돕고, 조선족 동포를 포용하고, 북한인권에 관심을 갖고, 사회적 약자를 돕고, 사회적 소수자의 편에 서야 합니다.

얼마 전 민간인 불법사찰문제가 불거졌을 때 MB정부가 제가 하는 시민운동을 사찰했음을 언론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무슨 일인가 보았더니 제가 정부의 재개발정책에 반대해서 체인을 감고 길거리에 드러눕는 등 극렬한 투쟁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주민의 85%가 내쫓기는 잘못된 재개발 정책에 항의하다가 두 번이나 체포되어 벌금형을 받았습니다.

저는 보수가 아닙니다. 저는 조선족동포 권익옹호를 위해 여섯 번이나 무기한 단식을 해서 동포들의 삶을 근본적으로 개선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종북(從北)좌파는 안 됩니다. 배고파 탈북한 주민을 총살하고 3족을 멸하는 나라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진보가 되려면 김정일, 김정은 편에 서지 말고 압제 하에서 신음하는 북한주민의 편에 서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진보입니다. 젊은이 여러분, 다시 한 번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총선 3일전

서경석 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