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起) — 공포는 실재했다
2020년 초, 세상은 진짜 두려움 앞에 섰다.
우한의 영상이 전 세계 스마트폰을 타고 번졌다. 복도에 쓰러진 사람들, 용접으로 봉인된 아파트 현관문, 산소호흡기를 두고 생사를 가르는 의료진의 눈빛. 그것이 설령 과장되거나 선별된 장면이었다 해도, 당시 이탈리아 북부와 뉴욕에서는 병상이 부족해 누구를 살릴지 선별해야 하는 비극이 실제로 벌어졌다. 초기 변이 바이러스는 독감보다 수십 배 높은 치명률로 고령층과 기저질환자를 쓸어갔다.
그러므로 방역 당국이 비상한 조치를 취한 것 자체를 무조건 부정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전례 없는 위협 앞에서 국가가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마스크 착용, 거리두기, 신속한 진단 체계 구축 — 이 초기 조치들에는 분명 생명을 건진 측면이 있었다. 위기의 실체는 인정해야 한다. 그래야 비판도 정직해진다.
승(承) — 명분은 어떻게 권력이 되었나
백신이 등장하면서 판도가 바뀌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짧은 기간에 개발된 mRNA 백신은 "중증화와 사망을 막는다"는 조건부 효능을 들고 나왔다. 주류 의학계의 논리는 이러했다. "감염 자체는 못 막더라도, 바이러스가 혈관을 통해 전신으로 퍼질 때 혈중 항체가 이를 차단해 생명을 지킨다." 델타 변이가 맹위를 떨치던 시기, 이 논리에는 통계적 근거가 없지 않았다.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정부는 백신 구매 계약을 비밀 유지 조항으로 봉인했다. 세금이 정확히 얼마에 어떻게 지불되었는지 국민은 알 수 없었다. 더 심각한 것은 "부작용이 발생해도 제조사에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면책 조항을 국가가 스스로 수용했다는 사실이다. 자국민을 보호해야 할 국가가, 제약 자본의 이익을 먼저 보호하는 '을(乙)'의 계약서에 서명한 것이다. 국민은 몰랐다. 아니, 알 권리를 박탈당했다.
백신의 부작용은 의학적으로 기록된 엄연한 사실이다. 심근염, 혈전, 아나필락시스 — 이른바 "1백만 명 중 1명"이라는 확률로 제시되었지만, 그 한 명이 내 부모이고, 내 성도이고, 내 이웃이라면 그 확률은 더 이상 통계가 아니다.
그 1명에 대한 정밀 검진 없이 하루 수십만 명을 밀어 넣은 접종 시스템은 효율적이었는지는 몰라도, 인간적이지 않았다.
전(轉) — 침묵의 카르텔과 민주주의의 훼손
이 지점에서 우리는 솔직해져야 한다. 방역은 어느 순간부터 생명 보호가 아니라 통제의 기술이 되어 있었다.
죽음을 통계로 만든 네 그룹의 공모
목회 현장에서 드러난 진실은 숫자 뒤에 숨겨진 민낯이다. 당시 코로나 확진 상태에서 사망하면 실제 사인에 관계없이 '코로나 사망'으로 분류하는 것이 행정적으로 간편했고, 경제적으로도 유리했다.
복잡한 사인 규명과 감염 관리 책임을 피하고, 정부 보조금을 원활히 수령했다.
소송의 험난한 길 대신 즉각적인 장례비 지원과 '감염병 희생자'라는 명분을 택했다.
"바이러스가 치명적이니 백신을 맞아야 한다"는 정책 추진 동력을 얻었다.
'K-방역' 성과 서사를 유지하며 국민 불만을 보상금으로 잠재웠다.
정부, 방역 당국, 병원, 유족 — 이 네 그룹은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가졌지만, 결론적으로 같은 방향을 가리켰다. 이를 '침묵의 카르텔'이라고 부르지 않는다면 무엇이라 불러야 하겠는가. 그리고 그 카르텔이 쌓아올린 데이터 위에서 "백신 덕분에 살았다"는 통계가 만들어졌다. 기초가 오염된 통계는 통계가 아니라 선전이다.
교묘한 기술로 눈과 귀를 막다
대한민국의 방역이 세계사에 특기할 만한 이유는 물리적 폭력 때문이 아니다. 세계 최고 수준의 IT 인프라를 활용해 구현한 '보이지 않는 통제' 때문이다.
신용카드 내역과 CCTV를 동원해 개인의 동선을 만천하에 공개했다. 확진자가 다녀간 시설은 실명과 주소가 함께 고지되었고, 특히 교회는 '집단 감염의 온상'이라는 낙인이 찍혀 일반 식당보다 훨씬 가혹한 규제를 감수해야 했다. 이는 종교의 자유를 행정 명령 아래 복속시킨 명백한 헌법 위반이었다.
혈세를 삼킨 악어와 악어새
글로벌 제약사와 국가 권력의 결탁도 반드시 짚어야 할 대목이다. 필요 이상으로 구매된 백신들은 창고에서 유효기간을 넘겼고, 수천만 회분이 폐기되었다. 수조 원의 혈세가 사라졌다.
더 심각한 것은 이 과정에서 백신 승인과 구매 결정권자들이 과연 제약사와 완전히 무관한 관계였는지, 그 불투명한 계약 이면에 '악어와 악어새'의 관계가 없었는지 제대로 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제약사가 제공한 데이터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부작용을 축소한 채 접종을 독려한 당국의 행태는 과학적 검증이 아니라 공포 마케팅이었다.
부검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인을 밝힐 기회를 스스로 포기했다. 그렇게 오염된 데이터 위에 "방역 성공"이라는 비문이 새겨졌다.
결(結) — 진실은 묻힐 수 없다
이제 바이러스는 독성을 잃고 계절 독감처럼 순환하고 있다. 거리두기는 해제되었고, 백신 패스는 사라졌다. 그러나 진실을 요구할 권리는 해제되지 않는다.
우리는 방역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던 부분과, 그 이름 아래 자행된 비민주적 통제를 냉철하게 분리해야 한다. 위기 자체는 실재했다. 그러나 위기는 민주주의를 정지시킬 정당성이 아니다. 위기일수록 개인의 존엄, 정보에 대한 권리, 이의를 제기할 자유가 더욱 견고하게 지켜져야 한다. 그것이 민주 공화국의 존재 이유이기 때문이다.
백신 부작용으로 떠난 이들의 죽음이 통계의 오류로 덮이지 않도록.
비밀 계약의 수혜자가 누구였는지 반드시 밝혀지도록.
교회가 방역의 희생양으로 쓰인 시간이 역사에 정직하게 기록되도록.
우리는 이것을 요청해야 한다 — 분노로서가 아니라, 공의를 향한 기억으로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한복음 8:32방역의 시간이 우리에게 남긴 가장 큰 과제는 바이러스의 극복이 아니다. 국가 권력이 '어쩔 수 없음'이라는 이름으로 자행한 거짓과 강압의 역사를 직시하고, 다시는 그 앞에 눈과 귀를 닫지 않는 시민으로 서는 것이다.
이 칼럼은 목회 현장의 경험과 공개된 통계 자료를 토대로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