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여름 오후의 장례식
1849년 7월의 어느 무더운 날, 독일 작센 지방의 작은 마을 뢰켄(Röcken)에 조종(弔鐘)이 울렸다. 마을 교회의 목사 카를 루트비히 니체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뇌질환으로 오랫동안 투병하다 36세의 나이에 숨진 그의 관 앞에는 세 아이가 서 있었다. 다섯 살 프리드리히, 세 살 엘리자베트, 그리고 아직 돌도 지나지 않은 루트비히 요제프였다.
프리드리히는 아버지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희미하게 기억했을지도 모른다. 부드러운 손길, 낮고 따뜻한 목소리, 저녁 기도를 드릴 때의 진지한 표정. 그러나 그 기억이 채 자리를 잡기도 전에, 아버지는 사라졌다.
그리고 정확히 6개월 후, 갓난아기였던 남동생 루트비히 요제프마저 숨을 거뒀다. 두 번의 관(棺). 두 번의 조종. 다섯 살 소년에게 세상이 전달한 첫 번째 메시지는 이것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은 떠난다."
가족은 마을을 떠나야 했다. 목사관은 목사의 집이었다. 프리드리히의 아버지가 없으니, 집도 없었다. 어머니 프란치스카는 두 아이를 데리고 나움부르크(Naumburg)라는 도시로 이사했다. 그곳에는 할머니와 두 고모가 있었다.
그렇게 꾸려진 새 집의 구성원을 세어 보면 — 어머니 프란치스카, 할머니 에르트무테, 고모 아우구스테, 고모 로잘리에, 여동생 엘리자베트. 그리고 남자라고는 딱 한 명, 프리드리히.
다섯 명의 여인들 사이에서 유일한 남성으로. 아버지 없이. 남자 형제 없이.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다섯 개의 커튼
나움부르크의 그 집에는 커튼이 많았다. 창문마다 두꺼운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고, 방마다 조심스러운 분위기가 흘렀다. 유복한 집은 아니었지만, 경건하고 단정했다. 다섯 여인들은 루터교 신앙 안에서 작은 아이를 키웠다.
그런데 어린 프리드리히의 눈에 비친 하나님은 어떤 분이었을까?
아버지를 데려간 분. 남동생도 데려간 분. 어머니를 혼자 남겨둔 분. 교회당에서 엄숙하게 예배를 드려야 하는 분.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난 아버지가 평생을 섬겼던 분.
하나님은 계셨다. 그러나 커튼 뒤에 있었다. 그것도 한 겹이 아니라, 여러 겹의 커튼 뒤에.
① 죽음의 커튼 — 아버지와 남동생의 죽음. 하나님은 사랑하는 사람을 데려가시는 분으로 각인됨.
② 여성성의 커튼 — 다섯 여인으로만 이루어진 세계. 남성적 하나님 아버지를 상상할 모델이 없었음.
③제도의 커튼 — 19세기 독일 루터교는 국가와 유착된 관료적 종교였음. 살아있는 신앙이 아니라 사회적 관습이었음.
④ 지성의 커튼 — 니체가 자라던 시절, 독일 대학에서는 성경을 신화로 분해하는 연구가 유행했음. 신학교수들이 앞장서서 성경의 권위를 흔들었음.
⑤ 고독의 커튼 — 또래들과 잘 어울리지 못한 외톨이 소년. 인격적 신앙 공동체를 경험할 기회가 없었음.
이 커튼들은 누가 의도적으로 친 것이 아니었다. 시대가 그랬고, 환경이 그랬고, 운명이 그랬다. 그러나 결과는 분명했다. 어린 프리드리히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손가락들은 보았지만, 하나님 자체는 보지 못했다.
훗날 그가 "신은 죽었다"고 외쳤을 때, 어쩌면 그것은 이 어린 시절을 향한 가장 솔직한 고백이었을지 모른다. 그에게 신은 처음부터 — 커튼 뒤에 있었다.
"꼬마 목사"라는 별명
이상한 일이 있었다. 다섯 여인들의 집에서 자란 프리드리히는, 어릴 때 또래들 사이에서 "꼬마 목사(der kleine Pastor)"라고 불렸다. 어른들이 농담처럼 붙인 별명이 아니었다. 진짜로 그랬다.
그는 조용하고 단정했고, 성경 구절을 잘 외웠으며, 예배 때는 누구보다 경건했다. 가정의 분위기가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어머니 프란치스카는 훌륭한 목사였던 남편의 모습을 아들에게서 다시 보고 싶었다. 그 기대는 무언의 압력이 되어 소년의 어깨에 얹혔다.
그런데 내면에서는 다른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프리드리히는 음악을 사랑했다. 열 살도 되기 전부터 피아노를 쳤고, 작곡을 시도했다. 글 쓰는 것도 좋아했다. 또래 아이들이 운동장을 뛰어다닐 때, 그는 방 안에서 시를 썼다. 열두 살에는 이미 두통과 눈의 통증으로 학교를 쉬는 날이 생겨났다. 몸이 그의 내면의 긴장을 먼저 알아채고 있었다.
1854년 여름. 나움부르크의 한 저택에서 어린 프리드리히는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슈만의 곡이었다. 창밖으로는 저녁 햇살이 길게 드리워졌다. 집주인 크루크 씨가 고개를 내밀며 말했다. "프리드리히, 언제 이렇게 실력이 늘었니?" 소년은 대답 대신 계속 건반을 눌렀다. 음악만이 그에게 말할 수 있는 언어였다.
14세가 되던 해, 프리드리히는 집을 떠나 기숙학교에 들어갔다. 슐포르타(Schulpforta). 독일 최고의 인문계 학교였다. 그곳에서 그는 그리스어, 라틴어, 고전 문학을 배웠다. 머리는 더욱 예리해졌고, 동시에 더욱 고독해졌다.
집이 그리웠다. 아니, 정확히는 — 집이 그립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었다. 다섯 여인들 사이에서 유일한 남성으로 자란 소년에게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허락되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강해야 했다. 혼자서도 강해야 했다.
신학을 버린 날
1864년 가을, 스무 살의 프리드리히 니체는 본(Bonn) 대학교에 입학했다. 전공은 신학과 고전문헌학. 어머니의 기대대로라면 그는 아버지처럼 훌륭한 루터교 목사가 될 것이었다.
그러나 한 학기만에 그는 신학을 그만뒀다.
무엇이 그를 돌아서게 했을까? 한 가지 사건이 아니었다. 여러 강물이 합쳐지듯 여러 요인이 함께 흘렀다.
먼저, 그가 만난 교수들이 문제였다. 당시 독일 대학의 신학 교수들 상당수는 이른바 '역사비평'이라는 방법론을 사용해 성경을 해부하고 있었다. 다비트 슈트라우스라는 학자는 예수의 생애를 신화로 분석한 책을 썼고, 포이어바흐는 "신은 인간이 만들어낸 투사(投射)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신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신앙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해체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었다.
19세기 독일 대학의 신학과는 오늘날과 달랐습니다. 많은 교수들이 성경의 기적들을 역사적 사건이 아닌 신화나 전설로 해석했고, 이 방법론은 "자유주의 신학" 또는 "역사비평학"이라고 불렸습니다. 믿음을 지키러 들어간 학생이 오히려 믿음을 잃고 나오는 일이 허다했습니다. 커튼이 대학 강의실에도 가득했습니다.
다음으로, 본 대학의 분위기가 니체에게는 실망스러웠다. 학생들은 술을 마시고 소란을 피웠다. 교수들은 자기들끼리 싸웠다. 니체는 학교에서 기대했던 진지한 지적 탐구 대신 혼란만을 보았다.
그리고 결정적인 것이 있었다. 그즈음 그는 쇼펜하우어(Schopenhauer)라는 철학자의 책을 읽었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세상은 맹목적인 의지의 충동으로 가득 차 있고, 거기에 신의 섭리 같은 것은 없다는 철학. 니체는 이 책에 전격적으로 매료되었다.
어머니는 아들이 신학을 그만뒀다는 소식에 분노했다. "너는 네 아버지의 수치야." 이 말은 나중에 38세의 니체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여전히 등장한다. 그는 이 말을 평생 잊지 못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살아야 했던 소년은, 아버지의 길을 떠남으로써 아버지를 수치스럽게 만든 아들이 되었다.
신학을 버리고 고전문헌학만 공부하기로 한 니체는 라이프치히(Leipzig) 대학으로 옮겼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의 인생을 바꿀 두 가지 만남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를 찾아서 — 바그너라는 사람
1868년 11월, 스물네 살의 니체는 라이프치히에서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를 처음 만났다. 당시 바그너는 55세. 이미 『트리스탄과 이졸데』, 『니벨룽의 반지』 등으로 독일 최고의 작곡가였다.
니체는 즉각적으로 압도되었다.
바그너는 모든 것에서 과했다. 감정이 과했고, 자신감이 과했고, 야망이 과했다. 그가 방 안에 들어서면 공간 자체가 달라지는 사람이었다. 니체가 평생 이상화했던 바로 그 남성적 에너지 — 아버지에게서 받지 못한, 다섯 여인들의 집에서는 볼 수 없었던 — 가 바그너에게 있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날 밤, 바그너는 피아노 앞에 앉아 자신의 새 오페라 중 한 장면을 연주했다. 니체는 숨을 죽이고 들었다. 음악이 끝나자 바그너가 뒤돌아보며 물었다. "어떤가?" 니체는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침묵이 바그너를 기쁘게 했다.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감동받은 자만이 그런 침묵을 낼 수 있었으므로.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바그너는 니체의 아버지 카를 루트비히가 살아있었다면 딱 같은 나이였다. 연구자들은 이것을 우연으로 보지 않는다. 니체는 바그너에게서 아버지를 보았다. 아니, 아버지보다 더 위대한 아버지를. 신화적 음악을 만드는, 세상의 규칙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천재적인 아버지를.
바그너도 젊은 니체를 각별히 여겼다. 니체가 주말마다 바그너의 집 트립쉔(Tribschen)을 찾아가면, 바그너와 그의 연인 코지마는 그를 가족처럼 대했다. 니체에게 트립쉔은 고향 같은 곳이 되었다. 어머니와의 관계가 불편해질수록, 바그너의 집이 더 따뜻했다.
그리고 바로 이 무렵, 니체에게 놀라운 일이 생겼다.
1869년, 스물네 살의 니체는 박사 논문도 없이, 구두 시험도 없이, 오직 발표한 논문들만으로 바젤(Basel) 대학교의 고전문헌학 교수로 임용되었다. 당시 기준으로도 전례 없는 일이었다. 그를 추천한 교수 리츨은 이렇게 썼다. "나는 40년의 교직 생활에서 이런 학생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의 재능은 무한합니다."
스물다섯 살의 교수. 그 소식을 들은 어머니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아버지의 수치"라 불렀던 그 아들이.
위버멘쉬(Übermensch)의 씨앗
바젤 대학교 교수가 된 니체의 내면에는 이미 한 가지 구조가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아직 이름은 없었지만, 나중에 그가 "위버멘쉬(초인)"라 부를 개념의 씨앗이었다.
그것은 간단히 말하면 이런 것이었다.
"나를 책임질 자는 나 자신뿐이다. 하나님이 계시든 안 계시든, 그분은 아버지를 데려갔고, 남동생을 데려갔고, 어머니에게 상처를 주었고, 세상은 여전히 불공평하다. 나는 내 힘으로 서야 한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아무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가치를 만들어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철학이기 이전에 생존 전략이었다. 다섯 여인들의 집에서, 아버지의 수치라는 낙인 속에서, 또래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고독 속에서 자란 소년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개발한 내면의 갑옷.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시편 27편의 다윗도 버림받음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그 자리에 자기 자신을 세우지 않았다. 여호와를 세웠다. 니체는 그 자리에 자기 자신을 세웠다. 이것은 단지 한 개인의 선택이 아니었다 — 이것은 하나님을 커튼 뒤에 숨겨버린 시대 전체가 만들어낸 비극적 귀결에 대한 가장 정직한 표현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 갈림길에서 한 가지 예고가 시작되었다.
혼자서 감당하기에 너무 큰 짐을 스스로의 어깨에 올려놓은 소년은, 이제 청년이 되어 그 짐을 계속 지고 걷기 시작했다. 머리는 점점 더 예리해졌고, 두통은 점점 더 심해졌다. 책은 점점 더 깊어졌고, 고독은 점점 더 깊어졌다.
커튼 뒤의 소년은 커튼을 직접 찢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그 커튼 뒤에 하나님이 없다고 선언하기로 결심했다.
다음 이야기는 그 선언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그리고 그 선언이 그 자신을 어떻게 무너뜨렸는지를 다룬다.
신을 죽이려면 먼저 신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믿었던 자만이 그토록 격렬하게 부정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