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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말렉성(עֲמָלֵקִיּוּת) — 성경이 규정하는 제거되어야 할 악의 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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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6-05-16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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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현실 | 신학 칼럼

아말렉성(性/ עֲמָלֵקִיּוּת)
— 성경이 규정하는 제거되어야 할 악의 원리

선린교회 | sunlin.kr

세상에는 설득하거나 교화할 수 없는 악이 있다. 협상할 수 없고, 인권의 언어로 보호해서도 안 되며, 살려두는 것 자체가 더 많은 피를 부르는 악이다. 성경은 이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신학적으로 정밀하게 규정하고, 그 처리 원칙을 분명히 가르친다. 그 열쇠말이 바로 '아말렉'이다.

오늘 이 글에서 사용하는 '아말렉성(עֲמָלֵקִיּוּת)'은 민족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아말렉이라는 고대 민족은 이미 역사 속에서 소멸했다(대상 4:43). 그러나 아말렉이 대표하는 악의 원리행위 패턴은 소멸하지 않았다. 아말렉성이란 그 원리와 패턴에 대한 신학적 범주어다.


1. 아말렉은 어디서 왔는가

창세기 36:12는 짧지만 충격적인 기록을 남긴다. 에서의 장자 엘리바스의 딤나가 아말렉을 낳았다는 것이다. 딤나는 호리 족속의 공주였다(창 36:22). 그녀는 비천한 자가 아니었다. 탈무드(산헤드린 99b)는 이 배경에 숨겨진 이야기를 전한다.

"딤나는 왕족의 딸이었다. 그녀는 언약 공동체에 들어오기를 원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청하였으나 그들이 거부했다. 그래서 그녀는 '다른 민족의 귀족이 되느니 이 민족의 종이 되겠다'며 엘리바스의 첩이 되었다. 그녀에게서 아말렉이 태어나 이스라엘을 괴롭혔다. 왜 이런 일이 생겼는가? 그들이 그녀를 밀어쳐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다."

— 탈무드 바블리, 산헤드린 99b

딤나의 거절은 아말렉의 탄생을 낳았다. 이것은 단순한 족보 이야기가 아니다. 배제와 거절이 어떤 역사적 결과를 만드는지에 대한 엄중한 경고다. 그러나 그 교훈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딤나의 아들 아말렉은 어머니의 상처를 이스라엘을 향한 구조적 적대로 전환시켰고, 그 패턴은 대대로 반복되었다.


2. 아말렉성의 다섯 가지 특징

신명기 25:17~18은 아말렉 공격의 방식을 이렇게 기록한다. "그들이 너를 길에서 만나 네가 피곤하고 지쳐 있을 때에 뒤에 처진 약한 자들을 쳐서 죽였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이 본문과 구약 전체의 아말렉 기사를 종합하면 아말렉성의 다섯 가지 특징이 드러난다.

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홍해 기적 이후 열방이 이스라엘을 두려워할 때, 아말렉만이 두려움 없이 공격해왔다. 이것은 단순한 용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실재에 대한 완전한 무시이며, 도덕적 억제력의 전면적 부재다.
② 약자와 후위를 표적으로 삼는다
전열 맨 뒤에 처진 노약자, 지친 자, 여성과 어린이를 공격한다. 정면 전투를 피하고 가장 취약한 곳을 노리는 것이 아말렉성의 전형적 방식이다. 이것이 비겁한 "양아치 근성"이다.
③ 도발 없는 선제 공격이다
아말렉은 이스라엘이 침략하거나 위협한 것이 없었을 때 먼저 공격했다. 이것은 방어적 반응이 아닌 이념적 선제 공격이다. 이스라엘의 존재 자체가 공격의 이유다.
④ 언약 공동체의 말살 자체가 목표다
경제적 이득이나 영토 확보가 아니다. 이스라엘의 존재를 지도에서 지우는 것 자체가 목표다. 이 이념적 말살 의지는 협상이나 타협의 대상이 될 수 없다.
⑤ 기만 전술과 위장 항복을 사용한다
자신에게 불리할 때 항복하는 척하다가 순간 돌변하는 것이 아말렉성의 전술이다. 불리할 때의 항복은 다음 공격의 준비일 수 있으며, 위장 항복 자체가 문서화된 전술이다.

3. 사울의 실패 — 자비의 이름으로 저지른 죄

사무엘상 15장은 성경에서 아말렉성에 대한 가장 결정적인 교훈을 담고 있다. 하나님은 사울에게 아말렉을 완전히 진멸하라고 명령하셨다. 그러나 사울은 백성의 눈에 좋아 보이는 것들과 아말렉 왕 아각을 살려두었다.

하나님의 반응은 단호했다.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삼상 15:11). 사무엘은 사울이 하지 않은 일을 직접 행했다.

"사무엘이 이르되 네 칼이 여인들에게 자식이 없게 한 것 같이 네 어머니가 여인 중에 자식이 없으리라 하고 사무엘이 아각을 길갈에서 여호와 앞에 찍어 쪼개니라"

삼상 15:33

사울이 자비를 베풀어 살려둔 아각의 후손은 수백 년 후 하만으로 다시 나타났다. 하만은 에스더서에서 유대 민족 전체의 학살을 기도한다. 불완전한 정의는 다음 세대의 더 큰 재앙을 예약한다. 아각을 살려둔 것이 사울의 왕위 상실을 초래했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 역사 전체를 위협하는 결과로 이어진 것이다.

잠언 12:10이 이 역설을 압축한다. "악인의 긍휼은 잔인이니라." 아말렉성을 가진 자에게 베푸는 자비는 미래의 피해자들에 대한 잔인함으로 귀결된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냉정한 진실이다.


4. 제거는 권리가 아니라 의무다

성경은 아말렉성에 대한 대응을 단순한 권리(right)가 아닌 의무(duty)로 규정한다. 세 본문이 이 의무의 신학적 삼각 구조를 형성한다.

레위기 19:16"너는 네 이웃의 피를 흘리도록 방관하지 말라"

히브리어 עָמַד עַל-דַּם רֵעֶךָ(아마드 알-담 레에카) — "이웃의 피 곁에 서서 방관하다"는 행위를 금지한다. 막을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막지 않는 것 자체가 죄다.

잠언 24:11~12"사망으로 끌려가는 자를 건져 주며… 네가 알지 못하였노라 할지라도 마음을 저울질하시는 이가 어찌 통찰하지 못하시겠느냐"

구할 능력이 있을 때 구하지 않는 것은 변명이 통하지 않는 죄다. "몰랐다"는 핑계는 하나님 앞에서 성립하지 않는다.

에스겔 33:6"파수꾼이 칼이 임함을 보고도 나팔을 불지 아니하면… 그 피 값은 내가 파수꾼의 손에서 찾으리라"

위협을 보았고, 경고하거나 막을 수 있었으나 하지 않았다면 — 그 결과의 책임은 행동하지 않은 자에게도 있다.

이 세 본문이 가르치는 것은 분명하다. 아말렉성이 확립된 자를 처단할 능력이 있음에도, 인권이나 자비의 이름으로 살려두어 타인에게 지속적 위협을 가하도록 방치하는 것은 — 성경이 말하는 의무의 위반이다. 더욱이 그 자가 항복을 역이용하여 인질을 잡거나 다시 공격의 기회를 노린다면, 살려둔 자의 손에도 그 피 값이 있다.


5. 집행의 원칙 — 국가의 칼과 정당방위

아말렉성에 대한 제거의 의무는 분명하다. 그러나 그 집행은 무질서한 자경(自警)이 아니다. 성경은 이 집행의 구조를 명확히 제시한다.

로마서 13:4는 선언한다.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니라." 칼 — 물리적 강제력 — 은 국가에 위임된 것이다. 군사 작전, 표적 제거, 대테러 소탕이 그 합법적 표현이다.

그러나 시민의 정당방위는 다른 차원에서 성립한다. 테러 행위가 증명된 자가 현장에서 항복한 경우라도, 그 곁에 있는 시민은 레위기 19:16과 잠언 24:11의 원칙에 따라 행동할 수 있다. 위장 항복은 아말렉성의 문서화된 전술이며, 그 현장에서 시민이 경험하는 위협은 합리적 위협 인식의 요건을 충족한다. 능력이 있을 때 처단하는 것은 자기방어를 넘어 타인 보호의 의무다.

한 가지 원칙이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소속이 아닌 행위가 기준이다. 테러 조직에 속했다는 이유만으로 처단할 수 없다. 그러나 테러 행위를 실행했고, 그 패턴이 확립된 자에게는 — 에스겔 18:20의 개인 책임 원칙 안에서 — 이 모든 원칙이 적용된다.


6. 오늘날의 아말렉성 — 이슬람 과격주의의 구조

아말렉이라는 민족은 소멸했다. 그러나 신명기 25:17~18이 규정한 아말렉성의 다섯 가지 특징은 오늘날 이슬람 과격주의의 구조 안에서 반복되고 있다.

이것은 이슬람이라는 종교 자체에 대한 평가가 아니다. 코란의 교리나 무슬림 전체에 대한 언급이 아니다. 하마스, 헤즈볼라, ISIS, IRGC(이란 혁명수비대)와 같이 특정 이념으로 무장한 과격 조직들의 행위 패턴이 아말렉성의 구조와 일치한다는 관찰이다.

아말렉성의 특징 현대 과격주의의 대응
약자·후위 표적 민간인, 음악 축제, 어린이·노인 등 무방비 대상 공격
하나님 경외 없음 종교의 이름으로 종교의 본질을 파괴하는 역설
도발 없는 선제 공격 존재 자체를 말살 이유로 삼는 이념적 공격
말살 이념 "이스라엘을 지도에서 지운다"는 공개 선언
기만·위장 전술 민간인 복장, 의료진 위장, 인질 전술, 위장 항복

2023년 10월 7일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은 이 구조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음악 축제에 모인 젊은이들(약자·후위), 키부츠 노인과 어린이들, 국경 지역 주민들이 새벽 기습을 받았다. 이것은 신명기 25:17~18이 기록한 아말렉의 공격 방식과 구조적으로 동일하다.


7. 이란과 미국의 대치 — 아말렉성의 국가적 표현

이란의 이슬람 혁명수비대(IRGC)는 아말렉성이 국가 체제 안으로 제도화된 사례다. IRGC는 단순한 군사 조직이 아니다. 이스라엘과 미국의 말살을 국가 이념으로 공식화하고, 하마스·헤즈볼라·후티 반군 등 다수의 대리 세력을 운용하며, 핵 프로그램을 통한 실존적 위협을 지속적으로 구축해왔다.

미국이 IRGC를 테러 조직으로 지정하고, 2020년 솔레이마니 사령관에 대한 표적 제거를 단행한 것은 이 신학적 논리의 실천적 적용이었다. 솔레이마니는 수십 년에 걸친 테러 지원, 미군 공격, 프록시 전쟁 조직화라는 행위 패턴이 충분히 확립된 인물이었다. 사법적 포획이나 재판이 아닌 군사적 표적 제거 — 이것은 로마서 13:4의 칼을 가진 국가가 아말렉성이 확립된 자에게 행할 수 있는 정당한 행사였다.

이란 핵 협상의 반복 실패는 또 다른 교훈을 준다. 아말렉성이 확립된 국가 체제와의 협상은 사울이 아각과 협상하려 한 것과 구조적으로 동일하다. 협상 테이블은 다음 공격의 준비 시간이 된다. 미드라쉬가 말한 "뜨거운 목욕탕을 식힌 자"의 논리처럼, 제재와 협상이 반복되는 동안 핵 능력은 임계점에 다가간다. 불완전한 대응의 반복이 더 큰 위협을 예약하고 있다.


8. 언론의 배반 — 아말렉성을 보호하는 이름들

오늘날 아말렉성의 가장 강력한 동맹 중 하나는 역설적으로 국제 주류 언론과 인권 기구들이다. 이들은 테러리스트의 행위를 중립적으로 서술하고, 때로는 그들의 인권을 적극적으로 옹호한다. 이것은 추상적 비판이 아니다. 구체적 사례들이 있다.

사례 ① BBC — "테러리스트"라는 말을 거부한 공영방송

2023년 10월 7일 하마스의 공격 직후, BBC는 1,200명을 학살한 하마스를 "테러리스트"라고 부르지 않겠다는 편집 방침을 고수했다. BBC 세계부장 존 심슨(John Simpson)은 이렇게 해명했다.

"테러리즘은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반대하는 집단에 사용하는 편향된 단어입니다. BBC가 누구를 지지하고 누구를 비난할지 말하는 것은 우리의 일이 아닙니다." — BBC 존 심슨, 2023년 10월

그 결과 BBC는 하마스를 "무장 단체(armed group)", "전투원(militant)", "팔레스타인 저항 세력" 등으로 표현했다. 이에 영국 국방장관 그랜트 샵스는 BBC의 태도가 "수치스럽다"고 공개 비판했고, 문화부 장관 루시 프레이저를 포함한 7명의 전직 문화부 장관이 BBC 사장 팀 데이비에게 공개서한을 보냈다.

더 충격적인 것은 2025년 9월 BBC가 하마스를 "테러 단체"라고 불렀다는 이유로 자사 진행자를 자체 징계한 사건이다. 진행자가 편집 방침을 어기고 "테러 단체"라는 표현을 썼다며 규정 위반으로 처리했다. 아동을 학살하고 인질을 잡은 집단을 "테러 단체"라고 부른 것이 방송사 내부 징계 사유가 된 것이다.

BBC 스포츠 기자 노아 에이브러햄스(22세)는 이 방침에 항의하며 사표를 제출했다. "테러리스트를 테러리스트라고 부르지 않는 것은 증오에 불을 붙이는 언어의 방치"라고 그는 말했다.

사례 ② CBC(캐나다 공영방송) — 이중 기준의 교과서

캐나다 공영방송 CBC도 동일한 방침을 적용했다. CBC의 편집 지침은 이렇게 명시한다.

"전투원, 군인 또는 누구든 '테러리스트'라고 부르지 말 것. 테러리즘 개념은 정치적으로 편향된 것이며 이야기의 일부다."

그러나 CBC는 캐나다 내 또는 서구에서 발생한 테러 공격의 가해자들에게는 "테러리스트"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이것은 CAMERA(미디어 정확성 위원회)가 지적한 명백한 이중 기준이다. 하마스에 의한 유대인 학살은 "무장 충돌"이 되고, 파리나 런던의 테러는 "테러"가 된다. 같은 행위에 다른 언어를 적용하는 것은 언론의 중립이 아니라 언론의 편향이다.

사례 ③ ICC — 학살자와 피해국 지도자를 동급으로 취급

2024년 11월, 국제형사재판소(ICC)는 이스라엘 총리 베냐민 네타냐후와 전 국방장관 갈란트에 대한 체포 영장을 발부했다. 체포 영장 발부 신청 당시 ICC는 네타냐후와 함께 하마스 지도자 신와르, 한니예, 데이프에 대해서도 동시 영장을 신청했다.

이에 대해 헝가리 총리 오르반은 "뻔뻔하고 냉소적이며 완전히 용납할 수 없다"고 비판했고, 아르헨티나 외무부는 "테러 조직의 잔인한 공격을 받은 민주국가의 합법적 자위권을 범죄화하면서 그 잔학 행위를 생략한 것은 국제 정의 정신을 왜곡하는 행위"라고 선언했다.

핵심 문제는 이것이다. 하마스 지도자들은 이미 사망했다(신와르 2024년 10월, 한니예 2024년 7월, 데이프 2024년 7월 사망 확인). ICC가 영장을 신청할 당시 이 사실이 확인되거나 확인 중이었음에도, ICC는 이스라엘 지도자들과 사망한 테러리스트 지도자들을 동급의 피의자로 묶어 발표했다. 다수 주요 언론은 이 소식을 "이스라엘-하마스 지도자 동시 영장"으로 보도하며 사실상의 도덕적 등가론을 확산시켰다.

1,200명을 학살하고 250명을 납치한 집단의 지도자와, 그 공격에 대응한 민주국가의 지도자를 같은 피의자 위치에 놓는 것 — 이것은 사법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아말렉성의 정당화다.

사례 ④ 유로-메드 인권 모니터 — 하마스 연계 기관이 생산한 자료로 NYT 칼럼 쓰기

이스라엘 외무부의 2025년 보고서는 "유로-메드 인권 모니터(Euro-Med Human Rights Monitor)"가 하마스와 연계된 조직임을 문서화했다. 이 기관의 대표 라미 아부 아부드는 2026년 1월 소셜미디어에 "우리 민족과 저항은 결코 무기를 내려놓아서는 안 된다"고 게시했으며, 이 기관은 "이스라엘 안보군에 의한 체계적 성폭력" 주장을 유포하는 캠페인을 벌였다.

이스라엘 외무부 보고서는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니컬러스 크리스토프의 기사가 이 기관의 자료를 주요 출처로 사용했다고 지적했다. 하마스 연계 기관이 생산한 정보가 세계 최대 영향력의 언론을 통해 "인권 보고서"로 유통되는 구조다.

▶ 공통 구조 — 왜 이런 일이 반복되는가

BBC·CBC의 언어 거부, ICC의 도덕적 등가론, 하마스 연계 기관 자료의 언론 유통 — 이 모든 사례에는 하나의 공통 구조가 있다. 아말렉성의 본질을 흐리고, 피해자와 가해자의 경계를 지우며, '균형'이라는 이름으로 악을 정상화하는 것이다. 신명기 25:18이 아말렉의 특징으로 지목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음"은 오늘날 "객관성"과 "중립"이라는 포장지를 두르고 언론의 편집 방침으로 제도화되었다.


9. 결론 — 정의가 살아있으려면

아말렉성(עֲמָלֵקִיּוּת)의 신학적 정의

아말렉성이란 하나님 경외 없이, 약자를 표적 삼아, 이념적 말살을 목표로, 기만 전술을 사용하며 반복적으로 공격하는 행위 패턴의 신학적 범주다. 이것은 민족이나 종교 자체가 아닌 행위의 본질에 대한 규정이다.

출애굽기 17:16은 선언한다. "여호와가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이것은 특정 민족에 대한 영구전쟁 선포가 아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약자를 짓밟으며 무고한 생명을 말살하려는 원리와의 영구적 싸움 선언이다.

세상은 이 원칙을 기억해야 한다. 아말렉성이 확립된 자를 협상과 설득과 인권의 이름으로 살려두는 것은 자비가 아니다. 그것은 미래 피해자들에 대한 잔인함이다. 사울이 아각을 살려두었을 때 하나님이 진노하신 이유가 여기 있다. 불완전한 정의는 다음 세대의 더 큰 재앙을 예약한다.

레위기 19:16은 말한다. "너는 네 이웃의 피를 흘리도록 방관하지 말라." 막을 수 있음에도 막지 않는 것, 죽일 수 있음에도 인권을 들먹이며 살려두어 더 많은 피를 부르는 것 — 이것은 자비가 아니라 공범이다.

정의가 살아있으려면 악을 악으로 부를 용기가 있어야 한다. 아말렉성을 아말렉성이라 부르고, 그것이 제거되어야 할 대상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정의이며, 이웃을 사랑하는 것의 다른 이름이다.


※ 본 칼럼에서 '아말렉성'은 특정 민족이나 종교 전체를 가리키지 않으며, 성경이 규정하는 행위 패턴의 신학적 범주어로 사용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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