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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의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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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6-05-29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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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의 제국

— 영화 권력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영화·방송·예술 산업의 이념 카르텔과 시민 문화의 바람직한 지향점에 관한 고찰

극장 불이 꺼지고 스크린이 밝아오는 순간, 우리는 무언가를 기대한다. 웃음이든, 눈물이든, 아니면 가슴이 뜨거워지는 감동이든. 그러나 때로 관객은 영문도 모른 채 감독의 철학 강의를 청강하도록 강요받고, 박수를 치지 않으면 교양 없는 사람이 되는 듯한 묘한 압박 속에서 극장을 나온다. 이 불쾌한 경험은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20세기 이후 예술 엘리트들이 공들여 구축해 온 하나의 권력 구조에서 비롯된다.


1. 이념성 영화의 세계적 사례들 — 예술이라는 이름의 선전

이념을 예술로 포장한 사례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20세기 초 소련의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이 만든 <전함 포템킨>(1925)은 탁월한 몽타주 기법으로 지금도 영화사에 빛나지만, 그 본질은 볼셰비키 혁명을 미화하기 위한 국가 선전물이었다. 나치 독일의 레니 리펜슈탈은 <의지의 승리>(1935)와 <올림피아>(1938)로 히틀러 체제를 웅장하고 아름답게 포장했다. 이 작품들은 지금도 "영화 기술의 걸작"으로 연구되지만, 그 이념적 목적은 역사의 법정에서 이미 단죄받았다.

현대로 오면, 이념성은 더 세련되고 교묘해진다.

★ <돈 룩 업> (Don't Look Up, 2021, 넷플릭스)

기후변화를 부정하는 인류를 풍자한다는 명목 아래, 보수적 정치인과 테크 억만장자를 희화하는 데 집중한다. 아담 맥케이 감독은 "관객이 분노해야 한다"고 공개 발언했다. 유명 배우들이 총출동했지만, 실제 관객 반응과 비평가 반응이 극명하게 갈렸다. 예술적 설득보다 이념적 동원이 우선된 전형적 사례다.

★ 할리우드의 '다양성 의무화' 물결 (2020년대)

아카데미 시상식은 2024년부터 오스카 작품상 후보 요건에 다양성·형평성·포용성(DEI) 기준을 공식 도입했다. 일부 스튜디오에서는 제작 단계부터 인종·성별·성소수자 체크리스트를 적용하기 시작했다. 디즈니의 <백설공주>(2025) 실사판은 제작비 약 2억 7천만 달러를 투입했으나 참혹한 흥행 실패를 기록했다. 이념이 스토리텔링을 앞서는 순간 관객이 외면한다는 것을 시장이 냉혹하게 증명했다.

★ 박찬욱 감독 <어쩔 수가 없다> (2025)

제82회 베네치아 국제 영화제 경쟁 부문 초청, 로튼 토마토 100% 신선도, 9분 기립박수. 그러나 실제 일반 관객들 사이에서는 "의미 없는 헛웃음", "감독의 수수께끼를 해독해야 하는 의무감", "돈 내고 거장에게 복종하는 느낌"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평단의 열광과 대중의 거부감이 이토록 극명하게 갈린 것은, 이 영화가 관객과 소통하는 예술이 아니라 감독의 자의식을 전시하는 공간으로 기능했기 때문이다.


2. 한국 천만 영화 속의 이념 코드

한국에서 천만 관객은 국민 5명 중 1명이 본 영화라는 뜻이다. 그 상징성 때문에 천만 영화는 단순한 흥행 지표가 아니라 사회적 메시지의 증폭기가 된다. 문제는 일부 천만 영화들이 역사적 사실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보다 특정 정치적 프레임을 정서적으로 주입하는 수단으로 기능했다는 점이다.

★ <변호인> (2013, 1,137만 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젊은 시절을 모티프로 한 이 영화는, 1980년대 공안 정국과 인권 탄압의 현실을 감동적으로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동시에 특정 정치인을 영웅화하는 구조가 선거 시즌과 맞물려 정치적 동원의 도구로 활용되었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 영화가 개봉 직후 특정 정치 세력의 상징으로 소비된 방식 자체가, 예술을 넘어선 이념적 기능을 했음을 보여준다.

★ <택시운전사> (2017, 1,218만 명) · <1987> (2017, 723만 명)

5·18 광주 민주화운동과 6월 항쟁을 다룬 두 작품은 역사적 사건 자체의 비극성과 의미를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평론계 일각에서는 이 영화들이 역사의 복잡성보다 선악의 단순 구도를 선택하고, 특정 정치 세력의 정통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서사를 설계했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홍콩 민주화 시위(2019) 현장에서 상영되며 정치적 도구로 쓰인 것은, 이 영화들의 이념적 기능이 국경을 넘어 작동했음을 보여준다.

★ <서울의 봄> (2023, 1,312만 명)

12·12 군사 반란을 소재로 한 이 작품은 완성도 높은 연출로 폭발적인 흥행을 기록했다. 그러나 특정 역사적 인물에 대한 서술 방식, 악당 캐릭터의 설계 방법, 그리고 영화가 개봉된 정치적 시점을 둘러싸고 "역사 영화인가, 정치 영화인가"라는 논쟁이 진지하게 제기되었다. 역사적 사실을 드라마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개입하는 편집과 강조의 문제는, 이 영화가 얼마나 균형 잡힌 역사 인식을 제공하는가에 대한 물음을 남긴다.

중요한 균형: 위 영화들이 다루는 역사적 사건들(5·18, 6월 항쟁, 12·12)의 비극성과 역사적 중요성 자체는 부정되어서는 안 된다. 문제는 역사적 사실의 중요성이 아니라, 그것을 어떤 프레임으로, 어떤 정치적 맥락 속에서, 어떤 의도로 배치하는가이다. 좋은 역사 영화는 역사의 복잡성을 정직하게 보여준다. 이념 영화는 역사를 현재의 정치에 복무시킨다.

3. 왜 영화 산업은 이렇게 되었는가 — 구조적 분석

① 영화학교에서 영화제까지: 닫힌 순환

한국영화아카데미(KAFA)를 비롯한 영화 교육 기관들은 특정 비판 이론과 사회학적 관점을 예술의 기준으로 내면화한 인재들을 배출한다. 이들은 영화제에서 수상하고, 영화진흥위원회의 지원을 받고, 평단의 극찬을 받으며 "권위"를 획득한다. 이 순환 구조에서 대중의 반응은 입력값이 아니다. 대중은 교육 대상일 뿐이다.

② 정부 지원금과 이념의 동조화

영화진흥위원회를 통한 국가 지원은 특정 종류의 영화에 유리하게 작동한다. "사회적 메시지", "역사 의식", "소수자 재현"이라는 심사 기준은 중립적으로 보이지만, 실제 적용 과정에서 특정 이념적 방향성을 가진 작품들이 선호되는 경향이 있다. 납세자의 돈이 특정 정치적 감수성을 가진 콘텐츠를 지원하는 데 쓰인다는 구조적 문제는 진지하게 논의되어야 한다.

③ 평단과 대중의 분리: 두 개의 점수

비평가 점수 평단이 부여하는 "예술적 가치"
이념 부합도가 암묵적 기준
관객 점수 실제 관람객의 직접 반응
감동·공감·재미를 기준으로

로튼 토마토에서 비평가 점수와 관객 점수가 극명하게 갈리는 현상은, 평단이 공유하는 이념적 기준과 일반 관객이 영화에서 원하는 것 사이의 간극을 정확히 보여준다. 이 간극이 클수록, 그 영화는 소통에 실패한 것이다.

④ '벌거벗은 임금님' 효과: 비판을 침묵시키는 아우라

거장의 이름 앞에서 "재미없다"고 말하면 "교양이 없는 것"이 된다. "이해 못 한 것"이 된다. "블랙 코미디를 소화할 능력이 없는 것"이 된다. 이 억압 메커니즘이 작동하는 한, 카르텔은 자체 비판 면역을 갖는다. 그러나 안데르센의 동화에서처럼, 진실을 말하는 것은 가장 이해관계 없는 자의 몫이다. 오늘날 그 목소리는 점점 더 커지고 있다.


4. 카르텔의 균열 —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다

좋은 소식이 있다. 카르텔은 영원하지 않다. 세 가지 힘이 이미 구조를 흔들고 있다.

첫째, 기술 혁명이다. OTT와 유튜브는 극장과 방송의 게이트키핑 권력을 해체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배급사의 선택을 받지 못한 작품들이 전 세계 수천만 명의 시청자와 직접 만나고 있다. 권위 있는 인증이 없어도 좋은 이야기는 찾아진다.

둘째, 시장의 냉혹한 심판이다. 이념 과잉 작품들의 연속적 흥행 참패는 투자 구조를 바꾸고 있다. 할리우드의 DEI 강박 영화들이 수억 달러의 손실을 기록하면서, 스튜디오들은 조용히 방향을 전환하고 있다. 이념은 흥행을 보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방해한다는 것을 시장이 증명하고 있다.

셋째, 시민 비평의 성장이다. 전문 평론가의 권위에 기대지 않고 자신의 감각으로 영화를 판단하는 관객이 늘고 있다. 유튜브와 SNS에서 형성되는 대중 비평은 때로 거칠지만, 그 안에는 오랫동안 침묵을 강요받아온 솔직한 목소리가 있다.


5. 시민들의 바람직한 문화적 지향점

카르텔이 스스로 무너지기를 기다리는 것은 수동적이다.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의 문화적 태도가 바뀔 때, 영화 산업도 바뀐다.

첫째, 권위에 기대지 않고 자신의 감각을 신뢰하라

영화제 수상작이라는 이유만으로 가치 있는 영화가 되지 않는다. 거장의 신작이라는 이유만으로 감동을 의무적으로 받을 필요가 없다. "나는 이 영화가 불편했다"는 정직한 반응이, "대단한 예술을 이해하지 못하는 나의 부족함"으로 귀결되어서는 안 된다. 관객의 솔직한 반응이야말로 가장 정직한 비평이다.

둘째, 성실하게 이야기를 섬기는 작품을 지지하라

감독의 이념이 아니라 이야기 자체에 충실한 작품, 관객에게 숙제를 주는 대신 자연스럽게 감동 속으로 이끄는 작품,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느껴지는 작품이 더 많이 만들어지도록 지갑을 열어야 한다. 시장은 거짓말하지 않는다. 관객이 선택한 것이 만들어진다.

셋째, 이념보다 완성도를, 메시지보다 공감을

좋은 영화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전에 먼저 인간을 사랑한다. 관객을 가르치기 전에 먼저 관객과 함께 웃고 운다. 성실한 장인 정신으로 빚어진 한 편의 영화가, 거장의 자의식으로 가득 찬 열 편보다 더 오래 기억된다. 이것은 예술의 타협이 아니라 예술의 본질이다.

넷째, 공적 지원 구조에 관심을 가져라

영화진흥위원회를 비롯한 공공 문화 지원 기구들이 어떤 기준으로 어떤 작품을 지원하는지, 그 과정에 시민적 감시의 눈이 필요하다. 납세자의 돈이 특정 이념의 확산에 쓰이는 구조는 민주주의의 문제이기도 하다.


결론을 대신하여
영화는 인간이 발명한 가장 강력한 이야기 매체다. 그것은 2시간 안에 사람을 울리고 웃기고 분노하게 만들며, 가치관을 흔들고 세계를 다르게 보게 한다. 바로 그 강력함 때문에, 영화는 예술로 남아야 하지 이념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야기는 인간을 섬길 때 위대해진다. 감독의 자의식을 섬길 때가 아니라, 관객의 마음에 찾아가 문을 두드릴 때, 영화는 비로소 예술이 된다. 성실한 이야기꾼을 기다리는 수천만 명의 관객이 있다. 그 관객들의 솔직한 목소리가, 스크린 위의 제국을 진정한 공론장으로 바꿀 수 있다.
주보 칼럼에 실리는 글
영화 《어쩔수가 없다》를 보고 — 정말 어쩔수가 없다면

박찬욱 감독의 《어쩔수가 없다》는 분명 공들여 만들어진 영화다.
배우들의 연기, 화면 구성, 상징의 배치, 사운드의 질감까지, 감독이 얼마나 세심하게 계산했는지는 쉽게 느껴진다. 국내외 영화제가 이 작품에 주목한 이유도 이해는 간다.하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감정은 감탄이 아니라 피로감이었다. 이 영화는 AI 시대 이후 인간 노동의 불안과 중산층의 붕괴 공포를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러나 그 불안은 현실적인 인간 드라마로 흘러가기보다, 점점 기괴하고 초현실적인 감각의 세계로 미끄러진다. 평론가들은 이를 블랙코미디라 부르지만, 내게 이 영화는 전혀 코믹하지 않았다. 오히려 차갑고 빨간 악몽에 가까웠다. 무엇보다 불편했던 것은 인물의 정서였다. 분명 한국 배우들이 등장하고 한국 사회를 배경으로 하지만, 인물들이 움직이는 감정의 결은 어딘가 낯설다. 어떤 장면들은 미국 독립영화의 문법을 빌려와 한국적 현실 위에 억지로 덧씌운 듯 보인다. 보는 내내 어지럽고 잡스러운 꿈속을 헤매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 영화를 둘러싼 해석들 역시 작위적이다. 치통은 불안의 은유이고, 첼로는 무너져가는 품격의 상징이며, 귀마개는 사회적 단절을 의미한다고 한다. 물론 예술에는 상징이 필요하다. 하지만 관객이 흘려보내고 싶고 짜증나게 하는 상징이라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일까?
관객이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 끊임없이 해설자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면, 그것은 과연 영화가 관객에게 다가간 것인가, 아니면 관객이 영화 권위에 맞춰 억지로 올라가야 하는 것인가. 최근 들어 나는 이런 의문을 자주 품게 된다. 왜 어떤 작품은 대중의 공감과 상관없이 반복적으로 권위를 획득하는가. 왜 어떤 감성은 “세련됨”으로 평가받고, 어떤 감성은 “촌스럽다”는 이유로 배제되는가. 물론 대중성만으로 예술의 가치를 판단할 수는 없다. 불편한 예술도 필요하고, 난해한 작품도 존재할 수 있다. 문제는 특정 미학과 특정 감수성만이 지속적으로 고급 문화의 언어처럼 소비되는 구조다. 오늘날 문화 권력은 과거처럼 노골적인 검열의 형태로 나타나지 않는다. 대신 영화제, 평단, 플랫폼, 담론, 네트워크 같은 훨씬 세련된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러나 그 안에서 승인된 문법만 반복적으로 권위를 얻는다면 스스로 무덤을 파고 있는 것이 아닌가.
결국 관객은 점점 이렇게 질문하기 시작한다. “정말 뛰어난 작품이라서 칭찬받는 것인가, 아니면 이미 정해진 문화 코드에 부합하기 때문에 칭찬받는 것인가.” 그리고 그것이 진정 이 시대의 예술인가?
예술은 본래 자유로워야 한다. 관객 역시 자유롭게 불편함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만약 관객수로만 그 가치를 따질 수 없다고 판단한다면 정말 어쩔수가 없다. 어쩌면 지금의 문화계에 정말 필요한 것은 더 많은 해설이 아니라, 대중의 불편함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 태도인지도 모른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며 깊은 인상을 받았다. 하지만 그것은 감동의 인상이 아니라, 오늘날 예술과 대중 사이가 얼마나 멀어졌는지를 다시 확인하게 만든 인상이었다.
나는 솔직히 영화인들이 창세기부터 진정한 예술 드라마를 만들어 주었으면 좋겠다. 수천년 전에 완성된 책이지만, 영화로 만들면 너무 좋은 소재들로 차고 넘친다. 이처럼 차고 넘치는 시대에 성경이 제대로 해석되지 못하고 영화로도 만들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현실이 참으로 안타깝다. 정말 어쩔수 없는 지경이라면(영화 자체가), 우선 최초의 이야기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
※ 이 칼럼에서 언급된 천만 관객 영화들에 대한 분석은 해당 영화들이 다루는 역사적 사건 자체의 중요성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역사적 사실과 그것을 특정 이념적 방향으로 편집·배치하는 방식은 구분되어야 합니다.
※ 영화 관련 관객 수 통계는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KOBIS) 기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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