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 다보스 포럼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창설한 ‘평화위원회’는 평화를 이상이 아닌 질서의 문제로 재정의하며, 유엔 중심 국제질서에 대한 미국식 현실주의의 정면 도전이다. 냉전 이후 UN은 인권, 규범, 다자주의가 보편적 가치가 되면서 수많은 선언과 합의가 넘쳤지만, 세계는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평화는 선언으로 유지되지 않았다. UN은 집행 능력을 분산시킨 채, 책임의 주체를 끝없이 희석하였다. 결국 누군가 현실주의를 외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만들어진 셈이다. 도덕적 선언이나 이념적 외침보다는, 힘·비용·책임이 명확히 배분된 이해관계가 정리되어야 문제가 해결되기 때문이다. 현실주의가 다시금 힘을 얻는 이유는 단순하다. 누군가는 총대를 메고, 비용을 지급하며, 결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평화위원회는 바로 이 상황 위에 세워진 구조다. 이 위원회는 평화를 도덕적 상태가 아닌, 관리되어야 할 질서로 정의한다. 그 결과 운영 방식 전반이 노골적으로 현실주의적이다. 회원국도 자발적인 이상 연대가 아닌, 초청과 승인으로 구성되고, 의사결정 역시 합의가 아닌 집중된 권한에 의해 이루어진다. 말뿐인 평화는 힘을 가진 폭력 앞에서 아무런 설득력도 갖지 못한다. 질서를 회복할 수 없는 평화 담론은 오히려 폭력을 방치한다. 현실주의는 인간을 이상화하지 않고, 제도 역시 이상화하지 않는다. 대신 실패 가능성을 전제로 설계하고, 책임과 비용을 명시한다.
이제 세계는 스스로의 한계를 직시하고 현실을 정직하게 인식하기 시작했다.
평화는 소망이지만, 질서는 필요 충분 조건이다. 조건 없는 소망은 반복해서 무너져 왔다. 이제 이 지점에서 대한민국 역시 냉정한 자기 점검이 필요하다.
언제까지 북한 동포들의 압제를 바라보며 무기력하게 대응하는 죄악을 방치해야 하는가? 고작 탈북한 용감한 동포를 보며 감격하며, 그들을 통해 전해지는 비참함 앞에 동정심을 발동하는 것으로 책임과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는가? 그 와중에 북한식 통일을 꿈꾸는 무리의 가슴만 잔뜩 부풀려 놓지 않았는가? 이제 우리는 외부의 질서 개입을 논해야 할 만큼 내부적 판단 능력을 상실한 상태에 이른 것은 아닌가? 현재 우리나라는 적극적인 통일 노력조차 골방 창고 맨 밑바닥에 버리지 못한 채 쌓아놓은 신문 더미와 같이 되었다. 우리는 기도만 하는 사이, 체제 내부를 약화하는 사상과 영향력은 이미 정치·입법·사법 전반으로 확산하고 있다. 대한민국도 이제 눈이 떠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들어야 할 하나님의 채찍 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