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C주의(Political Correctness)라는 ‘미러형 학문’의 민낯
‘다름’을 악으로 규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스스로를 관용과 포용의 수호자라 부르지만, 정작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에게는 한없이 잔인하다. 이것이 오늘날 서구 사회를 흔들고 있는 PC주의(Political Correctness, 정치적 올바름)의 역설이다. PC주의의 구조를 들여다보면 흥미로운 공통점이 보인다. 그것은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고, 오직 다른 무언가를 비추어야만 존재할 수 있는 ‘거울’을 닮았다. 정상적인 학문이 ‘A가 맞다’고 말하면, 이들은 ‘그러므로 A는 틀렸다’고 반사적으로 결론을 내린다. 논거를 쌓아 올리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것을 뒤집기만 하면 정답이 되는 구조다. 창조가 없고, 반사만 있다. 이 거울형 사고는 학문의 탈을 쓰고 있지만, 실상은 종교에 가깝다. 교리가 먼저 정해져 있고, 그 교리에 의문을 제기하면 이단으로 몰린다. ‘가부장제는 악이다’, ‘모든 불평등은 차별의 결과다’라는 결론은 검증의 대상이 아니라 신앙고백의 대상이다. 이 교리에 맞서는 데이터나 논리는 학문적 반론이 아니라 ‘혐오’나 ‘폭력’으로 낙인찍힌다. 비난이 곧 정의가 되고, 비난의 강도가 도덕적 우월성의 척도가 된다. 그 순간, 비난 자체가 얼마나 악한 태도인지는 까맣게 잊힌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 현상이 지성의 전당이어야 할 대학에서 가장 깊이 뿌리를 내렸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주요 대학들에서는 이념적 기준에 맞지 않는 연구자는 자리를 잃고, 학생들은 ‘정해진 정답’을 복창하도록 훈련된다. 진리를 향한 자유로운 탐구 대신, 이념을 향한 복종이 그 자리를 채웠다. 토론이 사라진 강의실에서는 새로운 생각이 자라지 않는다. 이것이 단지 학문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 이유가 있다. 창조경제는 ‘남들이 보지 못한 것을 보는 자유’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사고에 금기가 생기고, 질문에 한계선이 그어지면, 혁신의 씨앗은 싹을 틔우기도 전에 잘려 나간다. 실력보다 정체성이, 역량보다 이념적 충성도가 평가 기준이 될 때, 사회 전체의 창조적 에너지는 소리 없이 식어간다. 포용을 외치면서 배제를 실행하고, 자유를 말하면서 검열을 강화하며, 다름을 존중한다면서 다른 생각을 악으로 규정하는 이 모순-이것이 미러형 학문의 본질이다.
진리를 향한 탐구는 언제나 불편함을 감수하는 용기에서 시작된다. 틀릴 수 있다는 겸손, 반론을 들을 수 있는 인내, 그리고 결론보다 과정을 신뢰하는 지적 성실함 -이것이 학문의 오랜 덕목이었다. 이런 진리의 기초는 이미 성경에 계시되어 있다. 다시금 되찾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