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로그인
담임목사 칼럼

인간은 수수께끼인가, 길 잃은 탕자인가

페이지 정보
profile image
작성자
  • 0건
  • 6회
  • 26-04-10 16:29
본문
인간은 수수께끼인가, 길 잃은 탕자인가
주보칼럼 2026.4.12.

인간은 수수께끼인가, 길 잃은 탕자인가

우주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나노 단위까지 정밀하게 세팅된 이 세계에 홀연히 나타나 "내가 주인이다"라고 선언한 존재가 있다. 인간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그 주인은 자기 집을 불태우고, 이웃을 죽이고, 스스로를 파괴한다.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뇌과학적으로, 유전학적으로 이 지구에 최적화된 존재다. 면역계의 정교함, 신경망의 가소성, 언어를 통한 문화 누적 능력 — 어느 각도에서 들여다봐도 인간은 이 행성을 위해 설계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은 모순의 끝판왕이다. 공감 능력이 탁월한 존재가 가장 잔인한 고문을 고안했고, 아름다움에 전율하는 감수성이 가장 추악한 선동을 생산했으며, 죽음을 두려워하면서도 자존심을 위해 기꺼이 죽음을 택한다. 이 불일치는 어디에서 오는가.

세속 학문의 진단과 그 한계

진화심리학은 말한다. "인간의 공격성과 부족주의는 과거 환경에서 생존에 유리했던 적응의 잔재다." 설명력은 있다. 그러나 이 답은 결정적인 질문 앞에서 침묵한다. 왜 인간만이 자신의 본능을 부끄러워하는가. 늑대는 살육 후 자책하지 않는다. 인간은 한다. 이 부끄러움의 기원을 진화론은 설명하지 못한다.

정신분석학은 이드와 초자아의 영구적 갈등이라 부른다. 신경과학은 전두엽과 편도체의 불균형이라 기술한다. 실존주의는 본질 없이 던져진 자유의 대가라 철학화한다. 이 모든 답들이 현상을 묘사하는 데는 성공하지만, 공통적으로 실패하는 지점이 있다. 당위와 기원을 설명하지 못한다. 인간이 왜 그래야 하는지, 그리고 애초에 왜 이런 구조를 갖게 되었는지에 대해 세속 학문은 침묵하거나 순환논리로 돌아온다.

"인간의 위대함과 비참함은 동일한 원천에서 나온다." — 블레즈 파스칼, 『팡세』

파스칼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이것이 단순한 역설이 아니라 역사적 사건의 흔적이라고 보았다. 왕좌에서 쫓겨난 왕은 평민보다 더 비참하다.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자존심이 죽음보다 강한 인간의 모습은, 바로 그 자리가 원래 자기 것이었다는 왜곡된 기억의 반영일 수 있다.

성경의 진단 — 가장 정밀한 인간학

창세기는 인간을 두 개의 재료로 설명한다. 흙과 하나님의 숨결. 이것이 시적 표현에 불과하다면 무의미하지만, 이것이 존재론적 선언이라면 — 인간의 모순은 완벽하게 설명된다. 인간은 본래부터 두 세계의 시민이다. 물질 법칙 안에 있으나 물질 법칙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우주를 인식하고, 아름답다고 느끼고, 감사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우주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모른다. 인간이 인식할 때 비로소 우주의 아름다움은 완성된다.

그러나 창세기 3장은 이 통합이 무너진 사건을 기록한다. 청지기가 주인 행세를 시작한 날. 히브리어 라다(rada), 창 1:28의 "다스리라"는 독재가 아니라 책임 있는 통치다. 그 명령이 찬탈로 뒤집힌 순간부터, 인간은 자신의 역할에서 이탈했다. 결함이 추가된 것이 아니다. 통합이 해체된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이 내면의 분열을 철학자의 관찰이 아닌 내부자의 증언으로 기록한다. "내가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악은 행하는도다." 신경과학이 전두엽과 편도체의 갈등을 발견하기 이천 년 전, 성경은 이미 이 구조를 정확히 기술했다. 차이는 신경과학이 메커니즘을 보여주는 데 그치는 반면, 바울은 그 분열의 이름과 해법까지 제시한다는 점이다.

수수께끼인가, 탕자인가

수수께끼는 답이 없는 것이 아니다. 답을 모르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역설은 답이 없어서 수수께끼인 것이 아니다. 답을 알면서도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수수께끼처럼 보이는 것이다. 누가복음 15장의 탕자를 다시 읽으면 놀라운 사실이 보인다. 아버지는 그를 쫓아내지 않았다. 아들이 스스로 "먼 나라"로 떠났다. 그리고 아버지는 매일 그 길 끝을 바라보았다.

인간의 문제는 설계의 결함이 아니다.
본래의 자리에서 스스로 이탈한 것이다.

이것이 복음이 "회복"의 언어를 쓰는 이유다. 새 창조, 새 사람, 거듭남 — 이것들은 불량품을 폐기하고 다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찬탈된 자리를 올바른 관계 안에 되돌리는 구조 회복이다. 인간이 모순적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모순 자체가 이미 답의 방향을 가리킨다. 자신의 파괴를 부끄러워하고, 자신의 잔인함을 혐오하며, 더 나은 자신을 갈망하는 존재 — 그 갈망이 어디서 오는지를 묻는 순간, 수수께끼는 풀리기 시작한다.

인간은 수수께끼가 아니다. 집을 알면서도 돌아오기를 두려워하는 탕자다. 그리고 아버지는 여전히 그 먼 길 끝에서, 오늘도 바라보고 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댓글쓰기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