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 숨어있나, 르상티망적 군중들
요즘, "솥뚜껑 보고 놀란" 사람들이 많다. 이 표현은 피해자의 트라우마를 묘사하는 말인데, 오늘 우리 사회에서 이것은 전혀 다른 용도로 작동하고 있다. 솥뚜껑을 자라라고 우기며, 그 우김을 권력으로 삼는 자들의 이야기다. 2026년 5월 18일, 스타벅스 앱에 올라온 텀블러 할인 이벤트. '탱크데이'와 '책상에 탁!' — 본사가 붙인 제품명과, 무거운 텀블러를 책상에 내려놓는 소리를 흉내 낸 의성어. 직접적 연관은 없다. 기획 의도도 없었다. 그러나 이날 해가 지기 전에 스타벅스코리아 대표이사는 직을 잃었다.
요즘 진보진영은 묘한 트라우마로 고통받고 있다. 과거 그들은 자신과 견해가 다른 사람들을 '토착왜구', '매국노', '친일 부역자'라 불렀다. 특정 지역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인격을 능욕하는 언어가 공중파를 탔고, 거대 광장에서 마이크를 통해 울려 퍼졌다. 그 언어들은 은유가 아니었다. 직접적이었고, 반복적이었으며, 조직적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몇 달이 아니라 수년, 길게는 수십 년에 걸쳐 계속되었다. 아무도 그 언어의 피해자들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그 언어는 '정당한 저항'이었고, '역사의 심판'이었으며, '민중의 분노'였다.
니체는 근대 도덕의 심층에서 '르상티망(Ressentiment;원한, 분개)'이라는 심리 기제를 발견했다. 스스로 강해지거나 문제를 해결할 능력은 없지만, 강한 자를 향한 원한은 끝없이 끓어오르는 자들 — 그들은 자신의 무력감을 도덕적 우월감으로 치환함으로써 심리적 균형을 유지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 원한을 '정의'라는 언어로 포장한다. 자신의 파괴 충동을 숭고한 역사적 사명으로 둔갑시키는 것, 이것이 니체가 '노예 도덕'이라 불렀던 것의 본질이다.
르상티망의 가장 교묘한 특징은, 그것이 결코 스스로를 원한이라고 인식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것은 언제나 자신을 '피해자의 대변자'로, '역사의 양심'으로, '정의의 수호자'로 인식한다. 그 결과 자신들이 수십 년간 퍼부어온 언어적 폭력은 면책되고, 상대의 단어 두 개는 즉결 심판의 대상이 된다. 내로남불은 도덕적 해이가 아니다. 그것은 르상티망의 구조적 산물이다. 자신의 원한을 정의로 믿는 자에게, 자신의 폭력을 성찰할 이유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토마스 소웰은 이를 현대 지식 사회학으로 계승했다. 그의 개념 '선택된 자들의 비전(The Vision of the Anointed)'에 따르면, 이 집단은 자신들만이 역사의 올바른 편에 서 있다는 확신 속에서 행동한다. 그 확신이 있는 한, 그들의 언어는 언제나 '신성한 심판'이고 타인의 언어는 언제나 '의도적 범죄'다. 솥뚜껑을 자라라고 우기는 것이 가능한 것은, 바로 이 자기 면책의 구조 때문이다.
그 비대칭성이 가능하려면 언어 권력의 독점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 권력은 오랫동안 메이저 언론이 한 방향만을 향해 목소리를 키워온 데서 왔다. 무엇을 사건으로 만들고 무엇을 침묵으로 덮을지를 결정해 온 데서 왔다.
"해도 너무하지 않느냐." 이 한 문장이 플랫폼 곳곳에서 올라오기 시작했다. 스타벅스 매장 방문 인증 릴레이가 번졌고, 유튜브 댓글은 역방향 여론으로 채워졌다. 이것은 스타벅스를 사랑해서가 아니다. 단어 두 개로 사람을 즉결 처형하는 이 문법이, 수십 년간 자신들을 향해 퍼부어진 핵폭탄급 언어와 나란히 놓였을 때 — 그 위선의 낯짝이 너무도 선명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르상티망은 언제나 자신을 정의라고 믿는다. 그러나 비례감을 가진 사람은 그것을 정의라고 부르지 않는다. 메이저 언론이 외면하거나 왜곡해도, 플랫폼은 더 이상 그들만의 방송국이 아니다. 솥뚜껑을 자라라고 우기는 목소리만큼, 그것이 솥뚜껑임을 알아보는 눈들이 늘어나고 있다.
조지 오웰은 말했다. 정치 언어는 거짓을 그럴듯하게 만들고, 살인을 품위 있게 만들며, 허공을 견고하게 만들기 위해 설계된다고. 그 언어가 오랫동안 한 방향으로만 흘렀을 때, 사회는 서서히 무엇이 자라이고 무엇이 솥뚜껑인지를 구분하는 감각을 잃는다.
그 감각을 되찾는 일. 자신들의 언어적 폭력에는 한없이 너그럽고 타인의 우연에는 발작적으로 분노하는 내로남불의 구조를, 비례감 있는 눈으로 정면에서 바라보는 일. 그것이 지금 이 사회에서 가장 용기 있는 상식의 행동이다.
솥뚜껑은 솥뚜껑이다. 자라가 아니다.
그리고 그것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마침내 조용히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약자는 강자를 미워하는 자신의 감정을 도덕이라 부른다."
— 프리드리히 니체, 『도덕의 계보』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 마태복음 5: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