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벽을 지나가는 법
### — 하나의 근원에서 갈라져 나온 두 신비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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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론. 벽 앞에 선 사람, 그리고 그 벽을 세우신 분
누구에게나 벽이 있습니다. 고등학생에게는 풀리지 않는 수학 문제가, 대학생에게는 보이지 않는 미래가, 과학자에게는 눈에 잡히지 않는 원자의 세계가 벽입니다. 그리고 모든 인간에게는, 벽 중의 벽—자기 존재의 이유를 스스로는 결코 알아낼 수 없다는 벽—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글이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이 벽들은 서로 다른 벽이 아닙니다. 원자 속의 벽이든, 존재의 이유라는 벽이든, 그 벽을 세우신 분은 한 분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그리고 그 같은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신학자들은 오래전부터 이 두 계시를 '두 책'이라 불러왔습니다 — 자연이라는 책과, 성경이라는 책. 저자가 같으니, 두 책이 말하는 신비도 결국 하나의 뿌리에서 자라 나온 두 가지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글은 양자역학이라는, 인간이 발견한 가장 정교한 신비를 따라가면서, 그 신비가 어떻게 성경이 오래전부터 증언해온 더 큰 신비—창조주와 그분이 지으신 인간—를 가리키는지 살펴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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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장. 벽을 지나가는 빛과 입자 — 창조주의 손길이 새겨진 물결
아주 작은 입자 하나가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에너지 장벽 앞에 섰다고 해봅시다. 고전 물리학의 상식으로는 이 입자는 절대로 반대편에 나타날 수 없습니다. 공을 벽에 던지면 튕겨 나오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다릅니다. 이 입자를 '파동함수'라는 확률의 물결로 바라보면, 그 물결은 장벽 안에서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서서히 잦아들 뿐입니다. 장벽이 충분히 얇다면, 그 잦아든 물결의 끝자락이 반대편까지 이어지고, 거기서 다시 입자가 발견될 확률이 생깁니다. 이것이 '양자 터널링'입니다.
이 현상은 그저 신비로운 이야기로 끝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스마트폰에 든 플래시 메모리는 전자를 이 원리로 절연막 사이에 가두어 데이터를 저장하고, 원자 하나하나를 실제로 들여다보는 주사 터널링 현미경도 이 계산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태양이 오늘도 빛나는 이유 역시, 태양 중심부의 열만으로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전기적 반발력을 양성자들이 이 터널링으로 넘어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물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왜 자연은 이렇게까지 정교하게 설계되어, 인간이 그 안에서 이토록 아름다운 질서를 발견할 수 있게 되어 있는가. 케플러는 행성의 운동 법칙을 발견하고 이를 "신의 생각을 그분의 방식대로 다시 사유하는 것"이라 불렀습니다. 터널링의 방정식을 들여다보는 일도 다르지 않습니다. 이건 그저 인간이 자연에서 우연히 발견한 규칙이 아니라, 창조주께서 물질 깊숙한 곳에 새겨두신 질서를 뒤늦게 더듬어 찾아낸 것에 가깝습니다.
다만 정직하게 짚어야 할 부분이 하나 남아 있습니다. "왜 자연은 이런 확률의 방식으로 존재하는가", "우리가 관측하는 그 순간 무슨 일이 실제로 일어나는가"—이 질문은 물리학자들 사이에서도 아직 답이 갈립니다. 여기서 첫 번째로 배워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잘 계산되고 검증된 것과, 아직 닫혀 있는 신비를 섞지 않는 것.** 그러나 이 열려 있는 신비조차, 신앙의 눈으로 보면 두려운 빈틈이 아니라 창조주께서 남겨두신 여백입니다. 자연은 인간이 완전히 다 알아내도록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끝까지 다 알아낼 수 없다는 그 사실 자체가, 자연이 인간보다 크신 분의 작품이라는 것을 증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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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장. 화살은 어떻게 만들어지고, 무엇으로 검증받는가
이런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슈뢰딩거의 방정식이라는 게, 결국 이미 나타난 결과를 보고 거꾸로 맞춘 수식 아닌가?"
정확한 지적입니다. 실제로 슈뢰딩거는 1926년, 이미 19세기부터 실험으로 측정되어 있던 수소 원자의 스펙트럼선을 정확히 재현하는 방정식을 만들려고 했습니다. 이건 알려진 데이터에 맞춰 수식을 짜맞춘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진짜 흥미로운 이야기는 그다음부터입니다. 1928년, 조지 가모프는 이 같은 방정식을 가지고 완전히 다른 무대—원자 규모가 아니라 원자핵 내부, 전자기력이 아니라 강한 핵력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알파붕괴의 반감기를 미리 계산했습니다. 슈뢰딩거가 방정식을 만들 때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영역입니다. 그런데 이 계산값이 실제 측정된 반감기와 스무 자릿수가 넘는 범위에서 정확히 들어맞았습니다.
이것이 놀라운 이유는 이것입니다. 인간이 머릿속에서 만든 수식 하나가, 인간이 상상조차 못 했던 영역까지 미리 알아맞힌다는 것은, 그 수식이 인간의 발명품이 아니라 이미 거기 있던 질서를 발견해낸 것에 더 가깝다는 뜻입니다. 뉴턴 역학이 아직 발견되지 않은 해왕성의 위치를 미리 계산해냈고, 실제로 그 자리에서 해왕성이 발견된 것도 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렇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한 이론이 처음 세워지는 과정은 언제나 알려진 데이터에 대한 '맞춤'에서 출발합니다. 하지만 그 이론의 진짜 자격은, 그 맞춤의 범위를 완전히 벗어난 곳에서 새로운 것을 미리 알아맞히는 데서 판가름 납니다.** 그리고 신앙의 눈으로 보면, 이 자격 있는 이론들이 계속해서 새로운 것을 알아맞히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인간이 우연히 잘 던진 화살이 아니라, 애초부터 정확하게 겨냥된 과녁—창조주께서 세상에 심어두신 질서—을 인간이 뒤늦게 발견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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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장. 자연이 숨바꼭질에 진 것일까, 인간이 초대받은 것일까
이렇게 서로 다른 영역까지 정확히 들어맞는 예측이 반복된다는 사실은, 인간이 자연의 실제 구조를 붙잡았다는 뜻일까요, 아니면 그저 계산이 여러 번 우연히 맞아떨어진 것일까요?
물리학자 유진 위그너는 이 질문 앞에서 흥미로운 고백을 남겼습니다. 그는 인간이 순수하게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추상적인 수학이 자연을 이토록 정확히 기술하는 현상을, "부당한 효율성"이라 부르며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는 그 이유를 이해하지도 못하고, 우리가 그런 선물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도 알지 못한다."
신앙을 가진 사람에게 이 고백은 낯설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다고 말입니다. 위그너가 "선물"이라 부른 그 부당한 효율성은, 바울이 말한 "분명히 보여 알려진" 그 계시의 다른 이름일지 모릅니다. 인간이 수학이라는 도구로 자연의 질서를 발견해낼 수 있는 것 자체가, 인간이 그 질서를 지으신 분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았다는 증거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자연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우리를 지으신 그 마음이 자연을 지으신 그 마음과 같은 근원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물론 겸손해야 할 지점도 있습니다. 서로 다른 영역으로 예측이 반복해서 통하는 현상은 "완전한 우연"이라는 설명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우리가 자연의 본질을 온전히 포착했다"는 것까지 증명해주지는 않습니다. **예측의 성공과 존재의 온전한 이해는, 서로 다른 두 가지 질문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바로 이 지점에서 과학이 멈춘 곳을 넘어섭니다. 과학은 자연이 정교하다는 것까지만 말할 수 있지만, 신앙은 그 정교함 뒤에 계신 인격적인 분을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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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장. 신비를 향해 걸어가되, 두 책을 함께 읽는 법
여기서 흔히 저지르는 실수 하나를 짚어야 합니다. 옛사람들은 번개를 신의 진노로 여겼습니다. 훗날 전자기학이 번개의 원리를 완전히 밝혀내면서 그 자리는 사라졌습니다. 이렇게 "과학이 아직 설명하지 못하는 빈틈에 신을 밀어 넣는" 방식을 철학에서는 '갓오브더갭스'라 부릅니다. 이 방식은 위험합니다. 과학이 훗날 그 빈틈을 메워버리면, 거기 기대었던 믿음의 근거도 함께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애초에 이런 빈틈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종교개혁자 칼뱅은 하나님이 자신을 알리시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하나는 자연이라는 책이고, 하나는 성경이라는 책입니다. 과학이 자연이라는 책의 한 페이지를 완전히 읽어냈다고 해서, 성경이라는 다른 책의 메시지가 흔들릴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자연이라는 책을 정확히 읽어낼수록, 그 책을 쓰신 분의 솜씨가 더 선명하게 드러날 뿐입니다. 양자 터널링이 한때는 신비로 여겨졌지만 지금은 공학 교과서의 기본 단원이 된 것처럼, 자연의 신비가 하나씩 풀려가는 과정 자체가 창조주의 지혜를 증언하는 또 하나의 방식입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묘성을 매어 떨기 되게 하겠느냐 삼성의 띠를 풀겠느냐." 이 질문은 탐구를 금지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인간을 탐구의 자리로 초대하시면서 동시에, 그 탐구 앞에서 가져야 할 태도가 자만이 아니라 겸손이어야 함을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뉴턴이 만유인력을 발견한 뒤 이 우주의 정교함이 지적 설계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고백한 것도, 바로 이 자리에서 나온 고백입니다.
**신의 존재 자체를 수식으로 증명하려는 시도와, 신이 만드신 창조세계의 질서를 정교하게 이해하려는 시도는 전혀 다른 일입니다.** 그러나 이 둘은 결코 서로를 밀어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연이라는 책을 깊이 읽을수록, 우리는 성경이라는 책이 처음부터 증언해온 그 저자를 더 또렷하게 만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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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장. 지능이 아니라 신뢰, 그리고 인간이라는 가장 큰 신비
방정식을 세우고 검증하는 일은 지적 능력이 요구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요구하는 믿음은 지능의 문제가 아닙니다.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양자역학을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양자역학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인류 최고의 물리학자조차 원자 하나의 신비 앞에서 겸손해질 수밖에 없었다면, 인간이 자기 자신이라는 신비 앞에서는 얼마나 더 겸손해야 할까요.
여기 인간 존재의 가장 이상한 비대칭이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 몸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조차 알지 못합니다. 치명적인 병이 몸속에서 자라고 있어도 알아채지 못하고, 심장이 어떤 정밀함으로 뛰고 있는지, 뇌 속에서 얼마나 정교한 신호들이 오가는지 전혀 감지하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내가 나로서 존재한다"는 것만큼은 그 무엇보다 확실하게 압니다. 몸에 대해서는 백지에 가까운 무지를 가지면서, 존재에 대해서는 완전한 확신을 가지는 이 기이한 존재—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지으신 인간입니다.
그리고 이 확신에 찬 자아조차, 스스로를 지탱할 힘은 없습니다. 창세기가 그리는 인간의 첫 반응은 극복이 아니라 숨음이었습니다.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냉철히 보면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 불리면서도, 정작 자기 존재의 이유 앞에서는 짐승과 다를 바 없이 캄캄합니다. 만약 계시가 없었다면, 인간은 스스로 만든 답을 붙들고 몇 번이고 파멸 직전까지 걸어갔을 것입니다. 실제로 역사는 그런 일을 반복해서 보여줍니다.
성경은 바로 이 자리에 응답합니다. 고린도전서는 하나님이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택하셨다고 말하고, 히브리서는 믿음을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 정의합니다. 요한일서는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는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들은 인간에게 "네가 강하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직하게 말합니다. "너는 스스로 설 수 없는 존재가 맞다. 그러나 너를 지으신 분이 너를 붙드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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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론. 겸손한 담대함으로, 하나의 근원을 향하여
이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양자역학이 다루는 신비와, 신앙이 다루는 신비는 정말 같은 것일까요?
같은 방식으로 다루어지지는 않습니다. 과학은 창조세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정밀하게 밝혀내는 도구이고, 신앙은 그 정교한 질서 앞에서, 그리고 그 질서를 알아채는 인간 자신 앞에서 "왜 존재하며,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는 인격적 응답입니다. 이 두 질문은 서로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두 신비는 결코 서로 다른 근원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원자 속에서 벽을 통과하는 입자의 신비도, 인간이 자기 존재를 확신하면서도 자기 몸조차 알지 못하는 신비도, 결국 같은 한 분에게서 흘러나옵니다. 자연이라는 책과 성경이라는 책은 저자가 같기에, 한 책을 깊이 읽을수록 다른 책의 목소리가 더 선명하게 들려옵니다. 별들을 세고, 원자 속을 들여다보고, 우주로 나아가려는 인간의 탐구는 신앙이 위축시켜야 할 일이 아니라, 창조주께서 처음부터 인간에게 맡기신 일이며, 동시에 그 창조주를 향해 더 깊이 나아가는 하나의 예배입니다.
여러분이 오늘 마주한 벽—풀리지 않는 수학 문제든, 이해되지 않는 삶의 의미든, 혹은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자기 존재의 이유든—앞에서, 정확한 지식과 정직한 신뢰를 함께 갖추어 나가시길 바랍니다. 벽을 지나가는 법은 하나가 아닙니다. 계산으로 넘을 수 있는 벽이 있고, 신뢰로만 건널 수 있는 벽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두 벽 너머에는, 언제나 같은 한 분이 서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