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문화계와 주류 미디어가 수십 년간 쌓아 올린 이념의 담장이 밑동부터 무너지고 있다. 영화계는 공적 기금의 그늘 아래서 특정 사관을 대중에게 주입하는 전위대를 자처했다. 건국과 산업화, 자유민주주의와 한미동맹은 깎아내려졌고, 나라를 위해 헌신한 지도자와 공권력은 악마가 되었다. 국민의 세금으로 조성된 영화발전기금과 공공 펀드가 특정 진영의 서사를 정당화하는 데 쓰이는 동안, 관객은 사실 대신 연출된 분노를 학습했다. 언론은 이 전도를 바로잡기는커녕 거들었다. 문화계가 빚은 정치적 서사는 검증의 대상이 아니라 성역이 되었다. 보수 진영의 인물과 역사에는 작은 흠에도 현미경을 들이대면서, 근거 없는 음모론은 ‘영화적 상상력’이라는 면죄부로 감싸 주었다.
선거 문제에서 이 이중 잣대는 가장 노골적이었다. 2030 세대의 상당수는 이제 선관위의 해명도, 법원의 판결도 그대로 믿지 않는다. 언론은 이를 '음모론'이라는 한마디로 치워 버렸지만, 불신은 허공에서 자라지 않는다. 선거를 관리하는 기관이 투명성으로 답하지 않고 방어로 일관했을 때, 청년들은 공정이 아닌 은폐의 냄새를 맡았다. 그 의심을 풀어 줄 책무가 있는 법원마저 청년들의 눈에는 제 식구를 감싸는 불공정의 얼굴로 비쳤다. 불신을 만든 자들이 불신하는 국민을 꾸짖는 것, 이보다 뻔뻔한 전도가 있는가. 의혹을 제기하는 이들은 '극우'라는 딱지 하나로 일괄 처리되었고, 언론은 진실을 가리는 심판이기를 포기한 채 여론을 관리하는 도구로 전락했다.
그러나 흐르는 강물을 둑으로 영원히 막을 수는 없다. 거짓의 성벽에 균열을 낸 것은 다름 아닌 2030 청년세대였다. 오랜 ‘내로남불’과 불공정에 대한 체질적 거부감이며, 공정한 잣대를 잃은 문화·언론·사법 기득권에 대한 냉정한 결산이다. 육영수 여사 피격이라는 역사적 비극을 음모론의 소재로 삼고 그것을 ‘상상력’이라 포장했을 때, 청년들은 인륜의 마지노선이 무너졌음을 간파했다. 스타벅스의 ‘탱크데이’는 텀블러 판촉 행사의 이름이었다. 그러나 날짜가 5월 18일과 겹친다는 이유로 대표는 경질되었고, 회장은 모욕죄와 특별법 위반 혐의로 고발되었으며, 대통령까지 나서서 책임을 경고했다. 단어 하나에는 법적·정치적 책임을 묻는 바로 그 진영이, 한 가정의 비극을 영화 소재로 삼는 데는 ‘상상력’ 이라는 면허를 내준다.
하나님이 주신 공의와 정직은 거짓의 자물쇠로 영원히 잠가 둘 수 없다. 역사의 진실은 어느 카르텔의 전유물 이 아니다. 이번 청년들의 각성은 대한민국이 문화적 지배와 미디어 선동의 수렁을 벗어나 상식과 진실, 성경적 공의가 바로 서는 나라로 돌아가는 전환점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