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 그들을 토하리라 · 3편

우리의 선택

성도는 어때야 하며, 국가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요셉의 이집트와 아이티 — 준비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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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41장은 세계 최초의 국가 재난 관리 기록이다. 파라오의 꿈에서 요셉은 7년 풍년과 7년 기근을 읽어냈다. 그리고 5분의 1세를 7년 풍년 기간 동안 비축하라고 제안했다. 파라오가 그 제안을 받아들였고, 이집트는 7년 기근을 이겨냈다. 그뿐 아니라 기근이 든 주변 나라들이 양식을 구하러 이집트로 왔다. 같은 기근이 주변 나라들을 파멸시키는 동안, 이집트는 오히려 강해졌다.

요셉의 이집트와 2010년 아이티의 차이는 이것이다. 요셉의 이집트는 재난을 미리 읽고 준비했다. 그 준비는 지도자 한 사람의 탁월함이 아니라, 진실에 기반한 통치, 미래를 위한 자기 절제, 자원의 공정한 관리라는 원리 위에 세워진 것이었다.

재난이 닥치더라도 준비된 국가는 재난을 이겨낸다. 국가의 건국과 통치 원리가 그것이다. 부패한 나라는 재난을 이겨내지 못한다. 이것은 이제 하나의 명제가 아니라 관찰 가능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 질문은 추상적인 신학의 언어가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선택의 언어로 답해야 한다.


준비된 나라는 무너지지 않는다

8장 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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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는 재난 대비 매뉴얼을 만드는 것만이 아니다. 더 깊은 의미에서 준비는 통치의 원리가 무엇인가의 문제다.

느헤미야가 70년간 폐허로 방치된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기 위해 귀환했을 때,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성벽 공사가 아니었다. 귀족들과 관리들을 불러 모아 고리대금 착취를 중단시킨 것이었다(느 5장). 가난한 백성들이 흉년에 땅과 자녀를 담보로 빚을 지고 노예가 되어가는 것을 보고, 느헤미야는 선포했다. "너희가 이방인에게 팔린 너희 형제를 우리가 힘을 다하여 다시 샀거늘 너희는 너희 형제를 팔고자 하느냐"(느 5:8).

물리적 재건은 경제적 정의 없이는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이 느헤미야의 통찰이었다. 성벽을 쌓는 사람들이 동시에 빚으로 착취당하고 있다면, 성벽은 세워져도 공동체는 무너진다.

"지략이 없으면 백성이 망하여도 지략이 많으면 평안을 누리느니라"
잠언 11:14 — 국가의 안전은 군사력만이 아니라 지략(智略), 곧 선견지명과 공동체적 지혜에 달려 있다.

준비된 국가의 조건을 성경과 역사에서 추출하면 세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 진실에 기반한 통치 —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것에 근거하여 결정한다. 둘째, 다음 세대를 위한 자기 절제 — 현재의 편의를 위해 미래를 담보잡지 않는다. 셋째, 자원의 공정한 분배 — 자원이 생산자에게로 흐르는 구조를 유지한다.

이 세 조건이 무너질 때 다섯 가지 붕괴 요인이 자라기 시작한다. 이것이 1편에서 살펴본 나라들의 공통된 경로였다.


우리나라의 현실 앞에서

9장 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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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앞서 살펴본 나라들과 다르다. 독재가 없다. 선거가 작동한다. 언론이 살아 있다. 그러나 이것이 위기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한국의 위기는 외부의 적이 아니라 내부의 공동화(空洞化)에서 온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이것이 더 다루기 어렵다.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2023년 기준 0.72명이다. 이것은 단순한 통계가 아니다. 국가의 미래를 스스로 포기하고 있다는 신호다. 어떤 경제 정책도, 어떤 복지 제도도, 어떤 군사력도 인구 없이는 지속될 수 없다. 붕괴 요인의 다섯 번째 — '미래의 소멸' — 가 가장 두드러지게 작동하고 있다.

이념 전쟁은 더 심각하다. 진보와 보수로 나뉜 사회는 정책을 토론하는 것이 아니라 적을 상정하고 싸운다. 진실보다 편(便)이 중요하고, 사실보다 서사(敍事)가 강하다. 이것은 자기교정 기제를 시민사회 수준에서 파괴하는 과정이다. 선거로 지도자를 바꿀 수 있어도, 진영 논리에 포획된 시민사회는 그 선거 결과를 공동선(共同善)으로 수용하지 못한다.

사법부를 둘러싼 갈등도 반복된다. 진보·보수 어느 쪽도 사법부의 독립성 자체를 목적으로 삼지 않고, 자신의 편에 유리한 판결을 기대하는 도구로 사법부를 본다. 검찰과 법원이 정치적 전선이 될 때, 법의 지배는 공허해진다.

한국의 역설 한국은 붕괴 5단계 요인 중 1번(이념·신앙의 권력 도구화) 없이 5번(미래의 소멸)에 접근하고 있다. 독재 없이 인구가 소멸하고 있다. 이것은 외부 압박이 아닌 내부 의지와 공동체 덕목의 고갈이 주된 원인이라는 점에서, 처방이 더 어렵다.

한국 교회의 상황도 솔직히 직면해야 한다. 대형교회의 세습, 정치권과의 결탁, 사회적 신뢰의 하락 — 이것들은 단순한 제도적 문제가 아니다. 교회가 세상의 소금과 빛이어야 할 자리에서, 사회와 똑같은 구조적 오류를 반복하고 있다는 것이다. 교회의 도덕적 권위가 고갈될 때, 사회가 기댈 수 있는 최후의 도덕적 자원도 사라진다.


교회와 성도에게

10장 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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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은 예루살렘의 멸망 직전에 기록했다.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 서서 나로 하여금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들 중에서 찾았으나 찾지 못하였으므로"(겔 22:30). 하나님은 그 자리에 설 사람을 찾으셨다. 그러나 찾지 못하셨다.

이것이 성도의 자리다. 무너진 데를 막아 서는 것. 이것은 정치적 구호가 아니다.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선택들이다.

첫째, 회개다. 한국 교회가 먼저 서야 할 자리는 사회 비판의 자리가 아니라 회개의 자리다. 히스기야가 기도할 때, 그는 이스라엘의 죄를 먼저 자기 죄로 받아들였다(왕하 19장).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을 위해 중보할 때, 그는 "우리가 범죄하였다"고 말했다(느 1:6). 자신도 그 공동체의 일부임을 인정하는 것이 진정한 중보의 시작이다.

둘째, 중보 기도다. 방정식 4가 열어놓은 통로다. 의인의 기도는 역사를 바꾼다. 이것은 감상적 위로가 아니라 성경이 일관되게 증언하는 사실이다. 소돔을 위한 아브라함의 중보, 이스라엘을 위한 모세의 중보, 예루살렘을 위한 느헤미야의 금식 — 그 기도들이 역사의 경로를 바꾸었다.

방정식 4 — 경건한 중보의 역할 성도의 중보 기도는 분모를 키워 심판을 지연시키거나 무산시키는 하나님이 여신 통로다. 이것은 낭만적 희망이 아니라 성경의 일관된 약속이다. 야고보서 5:16: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셋째, 예언자적 증언이다. 교회는 진실을 말해야 한다. 권력에 아첨하지 않고, 이념에 포획되지 않으며, 공동선을 위해 불편한 진실을 말하는 자리. 예레미야는 왕이 듣기 싫어하는 말을 했기 때문에 구덩이에 던져졌다. 그러나 그가 침묵했다면 예루살렘의 역사는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넷째, 이념 전쟁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진보 교회도, 보수 교회도, 진영의 하부 구조가 되는 순간 예언자적 기능을 잃는다. 아모스는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의 제사장 아마샤가 "왕의 성소요 왕국의 집"이라 부른 벧엘에서 선포했다(암 7:13). 국가 권력의 보호 아래 있는 종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없다.


정부·사법부·입법부·국민에게

11장 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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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은 삶의 현장과 분리될 수 없다. 성경의 원리는 개인 경건의 영역만이 아니라 공적 삶의 구조에도 말한다. 다음은 각 영역을 향한 성경 원리의 구체적 적용이다.

정부에게

통치의 첫 번째 의무는 진실에 기반하는 것이다. 통계를 조작하고, 불편한 현실을 은폐하며, 임기 동안의 인기를 위해 미래 세대의 자원을 소모하는 것은 단순한 정책 실패가 아니다. 그것은 통치의 원리 자체를 배반하는 것이다. 요셉은 7년 풍년 동안 미래를 준비했다. 그 절제가 7년 기근을 이겼다. 국가 부채를 다음 세대에 전가하는 것, 인구 소멸의 실상을 직면하지 않는 것 — 이것들이 가장 근본적인 통치의 실패다.

참조: 잠 29:4 "왕은 정의로 나라를 견고하게 하나 뇌물을 억지로 내게 하는 자는 나라를 무너지게 하느니라"

사법부에게

사법부의 독립은 특정 판결의 방향이 아니라, 권력으로부터의 거리다. 진보 정권이 들어서면 진보적 판결이 나오고, 보수 정권이 들어서면 보수적 판결이 나오는 구조는 법의 지배가 아니라 권력의 지배다. 신명기는 재판장에게 명한다.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하지 말며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도 말고 세력 있는 자라고 두둔하지 말고 공의로 사람을 재판할지며"(레 19:15). 사법부의 독립성 자체가 선(善)이다. 그것이 침식될 때, 법은 강자의 도구가 된다.

참조: 신 16:19 "재판을 굽게 하지 말며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며 또 뇌물을 받지 말라"

입법부에게

입법부는 다음 세대를 위해 입법한다. 다음 선거를 위해 입법하지 않는다. 이 두 가지는 종종 반대 방향을 가리킨다. 재정 건전성, 출산율 대책, 교육 개혁 — 이런 의제들은 단기적으로 인기가 없다. 그러나 그것을 외면하는 입법부는 미래를 담보잡는 것이다. 공동선(common good)을 진영 논리보다 위에 두는 것이 입법자의 소명이다.

참조: 잠 11:14 "지략이 없으면 백성이 망하여도 지략이 많으면 평안을 누리느니라"

국민에게 — 이념 전쟁에서 벗어나야

이념 전쟁은 나라를 가장 은밀하게 무너뜨리는 방식이다. 상대를 악으로 규정하면, 공동선을 위한 협력은 불가능해진다. 나라를 지키는 것이 나의 진영을 지키는 것과 동일시될 때, 실제로 지켜야 할 나라는 사라진다. 국민은 정보를 검증하고, 서사보다 사실을 먼저 보며, 상대 진영에 공정한 기준을 적용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민주주의는 투표로만 유지되지 않는다. 진실을 사랑하는 시민들로 유지된다.

참조: 요 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교회에게 — 깨어 회개하고 기도해야

교회의 소명은 사회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양심이 되는 것이다. 그 양심은 먼저 자신의 죄를 고백할 때 신뢰를 얻는다. 세습, 재정 불투명, 정치 결탁 — 교회가 먼저 이것들로부터 돌아설 때, 사회를 향한 예언자적 목소리가 힘을 얻는다. 또한 교회는 기도해야 한다. 단순한 종교 의식이 아니라, 나라의 무너진 데를 막아 서는 중보로. 그것이 에스겔이 찾으신 사람의 자리다.

참조: 대하 7:14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


땅은 진실을 기억한다

에필로그 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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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이란의 우르미아 호수가 말라가는 것을 보며, 우리는 그 안에 하나님의 섭리를 읽을 수 있다. 기적적인 개입이 아니라, 창조질서 안에 내장된 도덕적 중력이 작동하는 방식으로. 수천 년 동안 쌓인 물을 수십 년 만에 고갈시킨 체제는, 문자 그대로 땅으로부터 응보를 받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관찰이 이란을 정죄하거나, 희생자의 죄를 논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실로암 망대 사건에서 방향을 바꾸셨듯이, 우리는 관찰자의 자리에서 우리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야 한다.

갈라디아서 6장 7절은 경고이면서 동시에 복음이다.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거짓 씨앗을 심은 나라들이 거짓 열매를 거두는 것이 공식의 한 면이라면, 진실의 씨앗을 심는 나라들은 진실의 열매를 거둔다는 것이 그 공식의 다른 면이다.

우리는 지금 어떤 씨앗을 심고 있는가. 우리 세대는 다음 세대를 위해 어떤 기초를 놓고 있는가. 땅은 진실을 기억한다. 그리고 때가 되면 반드시 응답한다.

에스겔이 찾으셨던 그 사람 — 무너진 데를 막아 설 사람 — 이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다면, 이 글의 목적은 이루어진 것이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

역대하 7:14
시리즈 전체 읽기
1편 — 무너지는 나라들: 왜 그들은 그 길을 걷게 되었는가 2편 — 심판의 구조: 재앙은 왜 그들을 삼켰으며, 하나님의 심판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3편 — 우리의 선택: 성도는 어때야 하며, 국가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